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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발라수초 산승의 망상수기 / 동아일보 / 1940.02.02

畢鉢羅樹抄 

山僧의 妄想手記 三

金達鎭


오늘의 朝鮮佛敎界에 名僧은 누구누구이며 學者는 어느분 어느분이며 思想家는 몇사람이나 되는지 나는 모릅니다. 어쨌든 節介가 없고 氣魄이 喪失된 世界에는 아무런 信仰도 바랄 수 없습니다.


흔히들 生活條件과 周圍環境의 不利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이란 얼마나 自己責任의 廻避와 轉嫁를 꾀하는 根性을 가젓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自己無力의 暴露에 不過하는 것입니다. 또는 그것은 自欺欺人의 훌륭한 手段도 되고 惰性隱蔽의 방패도 되는 것입니다.

H庵에서 점심 초대가 잇엇습니다. 거기는 女僧 스님만이 사는 修行場입니다. 내가 오래전부터 잘 아는 今年 七十된 “염수자”도 잇고 “능수자”도 잇고 나와 ××同窓卒業生인 K君의 慈堂도 오늘 처음 보앗습니다. 모다 十餘人의 大衆, 그이들의 生活은 參禪입니다.

床에는 무우와 버섯을 너흔 국 한그릇 동김치 짠김치, 콩자반 그러고 밥에는 팟과 조를 섞엇읍니다. 나는 만끽하엿읍니다. 포구국보다 조팟밥보다 그이들의 素朴하고 純粹한 人情이엇읍니다. 慈悲와 人情과 柔和가 佛敎生活人의 特徵이라면 그이들은 그 우에 “女性的”이라는 하나의 더한 要素로서 더욱 그러하엿읍니다.


×兄! 날시가 몹시 추웁습니다. 높은 嶺上이요 깊은 山골에다 더구나 눈뒤의 바람이라 정말 살을 어이는 것 같습니다. 몇 度나 되는지는 모르나마 서울 추위도 이 以上될 것 같지는 안습니다. 절간은 방따슨 맛으로 산다는 말과 같이 아닌게 아니라 따근한 방안에 앉어 고요히 타는 람푸를 바라보며 빈골을 울리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은 여간한 雅趣로운 風情이 아닙니다. 문듯 夜壑風寒松子落이라는 鏡虛 스님의 禪句가 생각히움니다. 그러다가 이런 밤이면 거리의 찬 사람들을 생각하엿다는 톨스토이의 모습도 눈앞에 나타낫읍니다.

×兄! 가끔 바람소리 속으로 건너 蓮花寺의 念佛 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念佛 소리에 무한한 宗敎的 魅力을 느끼며 그 心境을 끝없이 부러워합니다. 얼마나 高貴하고 平和로운 生活態度입니까? 徹底한 謙虛와 深刻한 反省으로 自己의 無力과 永劫의 罪業을 痛感할 때 傲慢한 自力, 一切의 計較를 放下投擲하고 오로지 彌陀의 本願에 歸任하는 마음 얼마나 갸륵하고 多情하고 또한 崇嚴한 것입니까? 佛의 無限한 慈悲에의 歸依 그 歸依할 힘조차 없는 罪의 아들을 당신이 스스로 나아가 크다란 救濟의 손을 펴서 안어주신다는 信仰이 終對他力 救濟의 原理가 아니겟읍니까? 大自力의 自力, 自力의 極致인 禪家의 眼中無人의 大自信도 泰然不動의 自我, 不惜身命의 意氣도 뼈를 깍는 듯한 反省과 謙虛의 根柢우에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러한 他力에의 信仰도 이미 이러한 境地에 왓을 때는 벌서 하나의 偉大한 悟가 아닐 수 없으매 이 點이 禪의 廓然大悟와 다를 바 없으며 同時에 아무런 禪의 自力도 한번 廓然大悟한 身心脫落底의 境地는 곧 天意隨順 그대로 他力 그것이 아니겟읍니까? 大安心大立命의 遊戱自在三昧의 絶對世界, 거기에 무슨 自力他力의 區別이 잇겟읍니까? 家家門路透長安을 한 句 불러보아도 조흘 것 같습니다.

×兄! 벌서 아홉時가 되엇읍니다. 바람은 아직 불고 念佛 소리는 끈첫읍니다. 나도 자야하겟읍니다. 나는 지금 자리에 들면서 西方 十萬億國土 저쪽의 極樂世界를 생각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月×日

×兄! 苦를 避하고 樂을 찾는 것이 人間의 本性이 아니라 樂을 피하고 苦를 찾는 것이 人間의 本質인가 봅니다. 憂鬱의 얼마나 달큼한 유혹입니까? 悲哀의 얼마나 美로운 愛着입니까? 아 얼마나 뿌리깊은 人間의 感傷性입니까! (끝) 


楡岾寺에서

2024.01.29입력 | 선암(이선화)조사 | 법진(강대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