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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隱和尙行狀

취은화상 행장

余廢棄湖西. 以養病懶. 二十有餘年矣. 聞取隱和尙之德馨遠飄. 而因南北敻隔. 未得親扣而滌心塵. 而和尙奄然歸寂. 其用恨特深焉. 

내가 호서 지방에서 쓸모없는 몸으로 병을 조섭하면서 게으르게 지내 온 지가 20여 년이었다. 취은 화상取隱和尙의 덕향이 멀리까지 알려졌으나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찾아뵙고 마음의 티끌을 씻지 못하였는데 화상이 훌쩍 입적하시고 말았으니, 한스러운 마음이 유독 깊었다.

光武四年冬. 有雲遊志. 過曹溪之松廣寺. 時適窮陰. 雪擁風鳴. 仍以信宿禪窓. 有慈應. 金明. 慈城三兄弟. 謂余曰

광무光武 4년 겨울, 운유雲遊할 뜻이 있어 조계산 송광사에 들렀다. 때는 마침 궁음窮陰이라 눈보라가 사납게 몰아치기에 선창禪窓 아래 이틀을 묵었다. 자응慈應·금명金明·자성慈城 세 사형제가 나에게 일렀다.

我先傅取隱和尙之時順間出世道業. 雖非古祖師之可肩. 而於近世也. 罕有聞見焉. 以先傅之高行. 爲而資者. 宜其著其行狀而傳後. 可也. 而今尙未焉者. 不暇焉. 而况高師文名素著. 禪奧亦深. 而適臨于此. 願借高師之一言. 以芳我先傅之遺蹟. 夫如是則非特我先傅之行業. 軒磊不朽. 而不佞等諸嗣足. 亦足以無餘憾焉. 請高師之不悋緖餘. 可乎. 

“우리 선사先師이신 취은 화상께서 시순時順사이에 이룬 출세간의 도업은 비록 옛날의 조사에 비길 수는 없지만 근세에는 거의 보고 듣기 어려운 것입니다. 선사의 높은 덕행으로 볼 때 우리 제자들은 의당 행장을 지어서 후세에 길이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행장을 짓지 못한 것은 그럴 겨를이 없어서였습니다. 고명하신 스님께서는 문명이 평소 알려져 있고 선지禪旨도 깊으신데 마침 이곳에 오셨으니, 원컨대 스님의 한마디를 빌어서 우리 선사의 남긴 발자취를 빛내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해 주신다면 우리 선사의 행업行業이 우뚝이 후세에 전해질 뿐만 아니라 저희 제자들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스님께서는 문필을 아끼지 말아 주소서.”

余再三推辭. 而其請彌勤. 謹按其嗣足之所錄. 和尙諱旻旭. 法號取隱也. 俗姓崔氏. 海州后人也. 以嘉慶二十年乙亥. 始寄宿於慶尙道奉化地. 而屋簷下過來者. 其翌年九月焉. 幼而壯且黠焉 . 有老成風度矣.

내가 재삼 사양했으나 그 청이 더욱 간곡하였다. 삼가 화상의 제자가 적은 기록을 살펴보건대, 화상의 휘는 민욱旻旭이고 법호는 취은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가경嘉慶 20년 을해년에 처음 경상도 봉화奉化에서 기식寄食하면서 그 이듬해 9월까지 남의 집을 전전하였다. 나이는 어렸으나 어른스럽고 과묵하여 노성老成한 풍도가 있었다.

十四歲. 忽然有出塵之趣. 北投太白山覺華寺秦珠長老. 祝髮受戒. 隨世緣打幻妄. 亦有年所. 豈曾悟其菩提道法. 不離世間耶. 年至不惑. 叅超隱丈老 太白山彌勒庵. 攝衣染指. 決擇正眼. 師資道契. 侍奉十秋. 應有得其玄奧之境. 而志在韜晦. 人莫得以知焉.

화상은 14세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 북쪽에 있는 태백산 각화사覺華寺 태주 장로泰珠長老에게 의탁하여 삭발하고 계를 받고서 세연을 따라 환망幻妄 속에 산 것이 여러 해였으니,보리도가 세간을 여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깨달았겠는가. 나이 불혹에 이르러 태백산 미륵암에서 초은 장로超隱長老를 찾아가서 옷깃을 여미고 법을 물어서 정안正眼을 결택, 스승과 제자의 도가 계합하여 10년 동안 초은 장로를 시봉하였으니, 응당 현묘한 경지를 얻었을 터이나, 화상은 자신을 숨기는 데 뜻을 둔 터라 사람들이 알 수 없었다.

後年至六十八癸未. 寓於般若峯下龍樹霱窩. 十年塊坐. 百慮灰冷. 忽然有頓悟處. 古人云. 如人飮水冷煖自知者. 此也. 淸虛禪師云. 寧可千劫輪廻生死. 不慕諸聖解脫. 禪家之眼也. 不見人之是非. 禪家之足也. 和尙之發心也. 期以頓悟. 而悟之. 而悟後生涯. 如頑石一片. 則其於禪眼. 有其庶幾焉. 而靑黃黼黻. 管絃技操. 不用聾瞽而是非自絕. 禪家之足也. 可謂十分周圓也.

그 후 화상은 나이 68세 때인 계미년에 이르러 반야봉 아래 용수율와龍樹霱窩에서 10년 동안 우거하면서 흙덩이처럼 앉아 온갖 망상이 불 꺼진 재처럼 싸늘히 식고 홀연 돈오한 곳이 있었으니, 고인이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따뜻함을 스스로 안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다. 청허 선사淸虛禪師가 “차라리 천겁 동안 생사에 윤회할지언정 성인들의 해탈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선가禪家의 눈이요, 남의 시비를 보지 않는 것은 선가의 발이다.” 하였다. 화상은 발심할 때 돈오하리라 기약하여 깨달았고, 깨달은 뒤의 생애는 한 덩이 돌처럼 굳었으니 선가의 눈에 거의 가깝다 하겠으며, 청황보불靑黃黼黻79)과 같은 화려한 장식이나 관현의 악기와 같은 아름다운 음악에는 굳이 귀먹고 눈멀지 않아도 시비가 절로 끊어졌으니 선가의 발을 십분 갖추었다 할 만하다.

盖北入香山. 南入頭流. 半生行李. 如閑雲野鶴. 而亦不以脫洒爲我所而自高. 其所蘊於中者. 得以偉旺鄭重. 不待智者而後知也.

화상은 북쪽으로 묘향산에 들어가고 남쪽으로 지리산에 들어가 반평생 행적이 한가로운 구름, 들판의 학과 같았으나 또한 탈쇄脫灑하다고 자처하여 스스로 고상한 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면에 온축한 도덕은 위대하고 정중하여 굳이 지혜로운 이가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當七十九年甲午春. 住錫桐裏之彌陀庵. 設禪會. 振玄風. 卓異其行. 至老不怠也. 越四年丁酉. 欲卜其終老之所. 晏居于明寂蘭若之三年己亥正月初七日. 感微疾. 至十四日申時入滅. 嗚呼. 有相必空. 世之所不免也. 而其奈道人之乘化也山野皆痛悼不已何.

79세 때인 갑오년(1894) 봄에 동리산桐裏山 미타암에 주석하면서 선회禪會를 열어 현풍玄風을 떨쳐 탁월한 행적을 보이면서 노년에 이르러서도 게으르지 않았다. 그리고 4년 뒤 정유년(1897)에 열반할 곳을 잡아서 명적난야明寂蘭若에서 편안히 지낸 지 3년째 되던 해 기해년(1899) 정월 7일에 작은 병에 걸려 14일 신시申時에 이르러 입적하였다. 슬프다! 형상이 있는 것은 반드시 공으로 돌아가는 것은 세상에서 면치 못하는 바이지만, 도인이 입적함에 산야山野가 모두 통곡하여 마지않음을 어이하리오!

其臨滅也. 神識安閑. 端坐如平日. 時有院主慧雲上座問曰. 和尙今欲入滅. 四山相逼. 其定慧一念. 堅凝不昧乎. 和尙竪起枕子而已. 奄然坐逝. 俱胝和尙之竪起一指. 終不以鹵莽歸之. 而普天寒熱. 焦摶打凍. 亦是走殺外邊也. 和尙竪起一枕也. 能殺能活有照有用底消息. 庵主之對趙州也. 不必專美於古也.

화상은 입적할 때에 정신이 평안하고 한가로웠으며 평소처럼 단정히 앉아 있었다. 당시 원주 혜운慧雲 상좌가 묻기를, “화상께서 지금 입멸하려 하시니, 사산四山이 핍박해 오는데 것이 반드시 옛날의 아름다움을 독차지 하지는 못할 것이다.

其夜三鼓. 一道瑞光. 橫空如虹橋. 經闍維後. 過五日而其光增淨. 五色散合玲瓏. 又有祥雲四合. 綸輪間錯. 遠近緇白. 瞻慕敬歎. 如古道人入滅時也.

그날 밤 3경에 한 줄기 상서로운 빛이 마치 무지개처럼 허공을 가로질렀고, 다비한 뒤 5일이 지나도록 그 빛은 더욱 맑고 오색이 영롱하게 모였다 흩어졌다 했으며, 또 상서로운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 서로 엉키고 뒤섞이니, 원근의 승속이 모여서 우러러보며 옛 도인이 입멸할 때와 같다고 경탄하였다.

盖和尙生於嘉慶二十一年丙子. 入滅於大韓光武三年己亥. 壽八十四. 十四歲出家受戒. 臘七十一也.

화상은 가경嘉慶 21년 병자년(1816)에 태어나 대한 광무光武 3년(1899) 기해년에 입적했으니 향년은 84세이고, 14세에 출가하여 계를 받았으니 법랍은 71세이다.

和尙嗣超隱義宥. 超隱嗣淵月以俊. 而浮休傳之碧庵. 碧庵傳之翠微. 翠微傳之栢庵. 栢庵傳之無用. 無用傳之影海. 影海傳之楓巖. 楓巖傳之碧潭. 碧潭傳之詠月. 詠月傳之樂坡. 和尙於浮休爲十二代孫也. 於太古爲十七世也.

화상은 초은 의유超隱義宥의 법을 이었고,초은은 연월 이준淵月以俊의 법을 이었다.부휴浮休는 벽암碧庵에게 전수하고,벽암은 취미翠微에게 전수하고,취미는 백암栢庵에게 전수하고,백암은 무용無用에게 전수하고,무용은 영해影海에게 전수하고,영해는 풍암楓巖에게 전수하고,풍암은 벽담碧潭에게 전수하고,벽담은 영월詠月에게 전수하고,영월은 낙파樂坡에게 전수하였으니,화상은 부휴에게 12대손이 되고, 태고太古에게 17대손이 된다.

佛化漸殘. 正法眼藏. 塗地而盡. 而和尙能專定慧. 大整頽綱於斯世也. 可謂火中蓮華也. 讃何可盡.

불법의 교화가 점차 쇠잔하여 정법안장이 죄다 사라졌는데, 화상은 정혜를 오로지 닦아서 이 세상에 무너진 불법의 기강을 크게 바로잡았으니, 불 속에 연꽃이 피어난 격(火中生蓮)이라 하겠다.찬탄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余以踈慵癈棄. 無用於世. 而佛化之爲弊瘼者. 百端俱發. 而道德不能濟得. 文章亦何救焉. 因此感憤. 置其文墨. 亦有年矣. 况閱盡炎凉. 文辭衰落. 無所用心於章句等事. 第因和尙之出世. 道業卓異其如斯. 而其嗣足慈應. 金明. 慈城三兄弟之勤請. 又其如斯. 不可强止. 於是乎槩畧如右. 而寓叙乎其前日未得親扣之恨之萬一云爾.

나는 무능하고 용렬하여 세상에 쓸모없는 몸이라 불법 교화에 온갖 폐단이 쏟아져 나오건만, 도덕으로도 구제할 수 없거늘 문장으로 어찌 구제할 수 있으리오. 이로 말미암아 감분感憤하여 문묵文墨을 놓고 지낸 지 여러 해였다. 더구나 염량세태를 겪으면서 문사文辭가 쇠락하여 글 짓는 일 따위에 마음을 쓸 수 없었다. 그렇지만 화상이 세상에 나와 그 도업이 이처럼 탁월하고, 그 제자인 자응·금명·자성 세 사형제가 또 이처럼 간곡히 청하기에 굳이 사양하고 말 수는 없었다. 이에 이상과 같이 대략의 행적을 기록하는 한편 지난날 찾아뵙고 배우지 못한 한의 만분의 일이나마 이 글에 담노라.
[G-01-0001]경허집 鏡虛集(ABC, H0283 v11, p.614a01)웹페이지 편집 : 법진 (2023 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