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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師鏡虛和尙行狀

선사 경허 화상 행장 (한암)
金剛經云。若當来世後五百歲。其有衆生。得聞是經。信心淸淨。即生實相。當知是人成就第一希有功德。大慧和尙云。若不間於强項中打發得幾人。佛法豈到今日。
『금강경』에 “앞으로 올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實相을 낼 것이니, 응당 알라. 이 사람은 가장 으뜸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대혜大慧 스님은 “만약 강항强項한 사람 중에서 간혹 몇 사람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불법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으리오.”라고 하였다.
盖發勇猛志徹法根源者。末法不無。故佛祖垂如是言。又罕有其人。慧命難保。故有如是言。孰能於此。具丈夫之志。而徹悟自性。成就其第一功德。而以大智慧光明義。廣大流通於後五百歲後也哉。繫我先師鏡虛和尙是也。
대개 용맹스런 뜻을 일으켜 법의 근원을 사무치는 이가 말법 세상에도 없지 않았으므로 불조가 이런 말씀을 후세에 남겼던 것이고, 또 그만한 사람이 드물어 불조의 혜명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뉘라서 여기에서 장부의 뜻을 갖추고 자기 본성을 사무쳐 깨달아 가장 으뜸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 광명의 뜻을 후오백세의 세상에 널리 펼칠 수 있겠는가? 바로 우리 경허 스님이 그러한 분이다.
和尙諱惺牛。初名東旭。鏡虛其號。俗姓宋。驪山人。考諱斗玉。妣密陽朴氏。以哲宗八年丁巳四月二十四日。生于全州之子東里。分娩後三日不啼。及浴身。始發兒聲。人皆稱神異焉。
스님은, 휘는 성우惺牛이고 초명은 동욱東旭이며, 경허는 그 호이다. 속성은 송씨宋氏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부친은, 휘는 두옥斗玉이고 모친은 밀양密陽 박씨朴氏이다. 철종 7년328) 정사년(1857) 4월 24일에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분만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시킬 때에 비로소 울음을 터트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이한 일이라 하였다.
早喪所怙。九歲随慈母上京。投廣州淸溪寺。依桂虛師。祝發受戒。而有兄在公州麻谷寺得度。皆其慈母歸心三寶。念佛誠勤。故捨二子爲出家也。年尙幼。而志若巨人。雖遇困苦。無疲厭心。負薪汲水。化飯供師。年至十四。不遑學文。適有一儒者来同過夏。而以渠之僑居消遣。招坐其傍。試授以千字文。随學輒誦。又敎以通史等書。日誦五六紙。嘆曰。此兒眞非常才也。古所謂千里之驪。不遇伯樂。困於塩車也。他日必成大器。救度一切人去矣。居無何。桂虛師還俗。惜其才学而未就。馳書薦送於鷄龍山東鶴寺萬化和尙。和尙即當世講匠也。見其氣宇英拔。喜而提誘。不幾月。善属文。討教意。日課經䟽。一覽便誦。終日打睡。而翌日論問時。其消釋文義。若析『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3a01-a23)
薪秉燭。講師責其多睡。而欲試其才。特㝎課於圓覚經中䟽抄並五六紙乃至十餘紙。亦如前睡。而誦亦如之。衆皆嘆其未曾有也。自此才名高著。遍叅嶠湖講院。学日進而聞益博。至於儒典莊老。莫不精通。天性踈闊。外無苟餙。盛炎看經。衆皆着衣正坐。不勝苦汗。獨破脫自若。不事形儀。一愚講師見之。謂門人曰。真大乗法器也。汝軰不及。二十三歲。以衆望開講於東鶴寺。論教義。波爛洋洋。四方学者多歸之。一日思其前日桂虛師眷愛之義。而欲一訪問於其廬。遂告衆發行。至中路。忽風雨暴至。急步入一家簷頭。則迫逐不受。移徃他家而亦然。一洞數十家。皆逐之甚急。而高聲呵責曰。方今此處。癘疫大熾。染者立死。汝何人入於死地。和尙忽聞其言。毛骨竦然。心神恍惚。恰似箇大限當頭。命在呼吸間。一切世間。都是夢外靑山。仍自念言。此生寧爲痴呆漢。不爲文字所拘繫。叅尋祖道。超出三界。發願已。推念其平日所讀公案。以義学習性。皆生知解。無叅究分。唯靈雲禪師所示驢事未去馬事到来話。解之不得如撞着銀山鉄壁。即看是甚道理。還山後。遂散衆曰。君等随緣好去。我之志願。不在此。閉門端坐。專心究看。夜欲將睡。引錐刺股。或磨刀當頣。如是過三箇月。所看話頭。純一無雜。有一沙彌近侍。俗姓李。其父坐禪多年。自有開悟處。人皆號爲李處士。沙彌之師傅者。適徃其家。與處士談話次。處士曰。爲僧者。畢竟爲牛。其師曰。爲僧而未明心地。但受信施。則必爲牛而償其施恩。處士呵曰。所謂沙門而答話如是不諦當乎曰。我不識禪旨。如何答之即是。處士曰。何不道爲牛則爲無『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3b01-b24)
穿鼻孔處。其師默然而歸。謂沙彌曰。汝之嚴父有如是說話。而我都不知其什麽意旨。沙彌曰。今籌室和尙。做禪甚緊。廢寢忘餐。當知是理。願師傅徃問之。其師欣然而去。禮畢而坐。傳李處士之言。到牛無鼻孔處。和尙眼目定動。撞發古佛未生前消息。豁爾現前。大地平沈。物我俱忘。直到古人大休歇之地。百千法門無量妙義。當下氷消瓦觧。時則高宗十六年己卯冬十一月望間也。心外無法。滿目雪月。高岑流水長松下。永夜淸霄何所爲。眞可謂這箇道理。非汝境界。同道方知。遂高卧方丈。不關人之出入。萬化講師入見。亦卧而不起。講師曰。何故長卧不起。對曰。無事之人。本来如是。講師無言而退。翌年庚辰春。來住於燕岩山天蔵庵。兄太虛禪師奉慈母在此故也。有頌與歌。發揮其悟證處。嶷嶷然崖岸千尋。蕩蕩然名言俱絶。實不讓於古祖師家風矣。其頌曰。忽聞人於無鼻孔。頓覺三千是我家。六月燕岩山下路。野人無事太平歌。其歌有四顧無人。衣鉢誰傳。衣鉢誰傳。四顧無人之四句。冠於首。結於尾。此深嘆其師友淵源已絶。無印證相受處也。嘗示衆曰。夫祖宗門下。心法傳授。有本有㨿。不可錯亂。昔黃蘗聞百丈擧馬祖喝而悟道。嗣百丈。興化於大覺棒下。悟臨濟喫棒底消息。嗣臨濟於滅後。我東國。碧溪入中國。得法於緫統而來。遠嗣龜谷。震默以應化聖。嗣法於西山滅后。其師資相承。嚴密如此者。蓋在於以心印心心心即相印也。嗚呼。時降聖遠。其道已廢。然間有本色衲子興起。以殺活箭。射得一介半介聖人。故隱隱地扶持他正宗来。如暗得燈。似絶復生。余雖道未充而性不檢。一生所向。期『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4a01-a24)
在於此一着子明白。而今老矣。日後我弟子。當以我嗣法於龍岩長老。以整其道統淵源。而以萬化講師爲我之受業師。可也。今遵遺教。而泝法源流。則和尙嗣龍岩慧彦。彦嗣錦虛法沾。沾嗣栗峰靑果。果嗣靑峰巨岸。岸嗣虎岩軆淨。而淸虛傳之鞭羊。鞭羊傳之楓潭。楓潭傳之月潭。月潭傳之喚惺。和尙於淸虛。爲十一世孫。而於喚惺。爲七世孫也。久住湖西二十餘年。瑞山之開心。浮石。洪州之天藏。皆捿息鍊道處也。己亥秋。移錫于嶺南伽倻山海印寺。時高宗光武三年也。有勅旨印經。又建修禪社。居心學者。而衆皆推和尙爲宗主。陞座舉揚。直示本分。用白拈手。振殺活機。可謂金剛寶釰。獅子全威。聞者皆見亡執謝。洒然若換骨洗膓矣。結制上堂。拈柱杖一下云。三世諸佛歷代祖師天下善知識老和尙。總在這裏。又一卓劃来云。三世諸佛歷代祖師。又一卓劃去。三世諸佛歷代祖師天下善知識老和尙。總随去也。天下善知識老和尙。總随去也。大衆還會麽否。衆無對。擲柱杖下座。僧問。古云。動容揚古路。不墮悄然機。如何是古路。答。古路有二。一坦路。一險路。如何是險路。伽倻山下千岐路。車馬時時任徃來。如何是坦路。千尋絶璧無人到。惟有猢猻倒上來樹。解夏上堂。擧洞山示衆云。秋初夏末。兄弟東去西去。直須向萬里無寸草處去。余則不然。秋初夏末。兄弟東去西去。路上雜草。一一踏着始得。與洞山語。是同別。衆無對。良久云。衆已無對。余自對去。便下座歸方丈。其直截提示。類皆如此。而鷲山之通度。金山之梵魚。湖南之華嚴松廣。皆和尙遊歷處也。自后禪院四方爭設。發心衲子。亦觀感而雲興。時順間。洗佛『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4b01-b25)
光明。開人眼目。未有如此之盛也。壬寅秋。和尙住梵魚寺金剛庵。邑之東摩訶寺。有羅漢改粉佛事。而淸和尙以作證。夜暮抵寺洞口。路黑難進。寺之主僧。忽坐睡。一老僧告曰。大和尙來也。急出迎之。主僧夢覺。執炬下洞口。果和尙來矣。始知羅漢之現夢。告于衆。衆皆驚異。前有毁謗不信者。皆來懴悔焉。癸卯秋。自梵魚寺徃海印。途中有口號一絶。識淺名高世危亂。不知何處可藏身。漁村酒肆豈無處。但恐匿名名益新。盖詩言志。可知其志在韜晦惟求人不識也。翌年甲辰春。入五臺。歷金剛。到安邊郡釋王寺。適有五百羅漢改粉佛事。而諸方碩德。皆來法會。共作叅證。和尙臨壇。唱獨能之辯。一衆合掌。呈希有之嘆。回向後潛跡。不知所徃矣。十年後。自水月和尙。書信來付於禮山郡定慧禪院。即和尙長髮服儒来徃於甲山江界等地。或村齋訓蒙。或市街啣盃。壬子春。在甲山熊耳坊道下洞書齋入寂云。慧月滿空兩師兄。直入其地。奉柩就蘭德山闍維。得臨終時書偈而還。即和尙入滅後翌年癸丑七月二十五日也。聞諸其洞中父老。和尙一日坐籬下。看学童鋤草。忽卧而不起曰。予甚困也。衆人扶入房內。不食不言。又不呻吟。伸脚而卧。至翌日藜明。忽起坐。拈筆書偈曰。心月孤圓。光呑萬像。光境俱亡。復是何物。尾作一圓相○。因投筆。右脇而卧。奄然遷化。時壬子四月二十五日也。我等備禮。葬於某山云。嗚呼哀哉。大善知識出世。實萬劫難遇。而吾儕雖暫得親見。未能久侍叅学。歸寂之日。又未得『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5a01-a24)
叅決後事。如古道人入滅之時。餘恨可旣。和尙生於丁巳。寂於壬子。九歲出家。壽五十有六。臘四十有八。有受法第子四人。曰枕雲玄住。行道於嶺南表忠寺。而臨終在梵魚寺。說法書偈而化。曰慧月慧明曰滿空月面兩禪伯。自妙年叅侍。深得和尙宗旨。各爲一方師。提接方来。其化大行。而余雖不敏。亦曾參聽玄旨。而只重先師不爲我說破。故不敢辜負其法恩。是爲四也。夫行狀者。記其實。不以虛也。和尙之悟道揚化因緣。誠如上言。若論其行履。則身長貌古。志氣果强。聲若洪鍾。具無碍辯。對八風。不動如山。行則行。止則止。不爲人之打之遶。故飮啖自由。聲色不拘。曠然遊戱。招人疑謗。此乃以廣大心。証不二門。超放自如。如李通玄宗道者之類乎。抑亦不遇而慷慨。藏身於下劣之地。以卑自牧而以道自樂歟。非鴻鵠。難知鴻鵠之志。非大悟。安能不拘於小節哉。和尙詩有酒或放光色復然。貪嗔煩惱送驢年。佛與衆生吾不識。平生宜作醉狂僧之句。寫出其一生行履也。然其安處也。食纔接氣。掩關終日。沈然寡言。不喜見人。人或勸揚化於大都會。則曰。吾有誓願。足不踏京城之地。其卓越勁挺。盖如此。住天蔵庵時。一領鶉衣。寒暑不改。蚊蚋繞身。虱兒滿衣。晝宵侵囓。肌膚瘡爛。寂然不動。坐如山嶽。一日。有蛇上身。蟠蜿於肩背。傍人驚告。叅然無心。小焉蛇自引去。非與道凝精。孰如是哉。一坐多年。如經刹那。一朝有吟。一絶曰。世與靑山何者是。春城無處不開花。傍人若問惺牛事。石女聲半刼亦歌。遂拗折柱杖。擲於門外。翩『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5b01-b24)
然出山。随方宣化。脫略窠印。不存軌則。或懶遊城序。混同塵俗。或閑卧松亭。嘯傲風月。其超適之趣。人莫能測。有時垂示。則極柔和。甚精細。演不可思議之妙旨。可謂善到底惡到底。不可以修断而修断也。文章筆法。皆過於人。真希世偉人也。噫。出家之人。皆如和尙勇進濶步。而辦明大事。燈燈相續。則九山隆化。十六継旣。豈獨專在於前昔也哉。非特隆化継統而已。抑亦使一切衆生根本智光明種子。永不断絶於五濁界中矣。豈非深心奉塵刹名爲報佛恩哉。吾所以焚香深祝者也。然後之学者。學和尙之法化則可。学和尙之行履則不可。人信而不解也。又依法者。依其真正妙法也。不依人者。不依其律儀與不律儀也。又依者。師而效之也。不依者。不見其得失是非也。学道之人。畢竟法亦能捨。况於人之得失是非乎。故圓覚經云。末世衆生發心修行者。當求一切正知見人。心不住相。雖現塵勞。心恒淸淨。示有諸過。讃嘆梵行。不令衆生入不律儀。求如是人。即得成就阿耨萻提。彼善知識。四威儀中。常現淸淨。乃至示現種種過惠。衆生於彼。心無憍慢。不起惡念。金剛經云。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是人行邪道。不能見如来。又普照國師云。夫叅学者。發足。先植正因。信五戒十善四諦十二因緣六度等法。皆非正因。信自心是佛。一念無生。三祇刼空。如是信得及。乃是正因。然則戒諦緣度等法。尙非正因。况於不律儀乎。故但求正知見人。決擇『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6a01-a24)
自已淸淨道眼。不可以妄求邪信。誤着大事也。又古德云。只貴眼正。不貴行履。又云。我之法門。不論禪定觧脫持犯修證。惟達佛之知見。此非先開正眼而後論行履耶。故曰。学和尙之法化則可。学和尙之行履則不可。此但責其未具擇法眼而先效其行履無碍者也。又策其局執於有爲相見。不能洞徹心源者也。若具擇法正眼而洞徹心源。則行履自然稱真。四威儀內。常現淸淨。安可爲外相之所幻惑。起愛憎人我之見也哉。庚午冬。滿空師兄在金剛山楡岾寺禪院祖堂。寄書於五抬山中。囑余述先師行狀。余本不閒於文辭。然其於先師行狀。不敢以已之。故記其事。以示後人。一以讃末法中真善知識出世弘法之難思功德。一以警吾軰之妄執外走而虛度時日以傷損佛化之過失焉。又以禪師之詩咏與記文若干篇。付同行諸禪和。抄錄印刷。行于世。佛紀二千九百五十八年辛未三月十五日。門人漢岩重遠謹撰。
스님은 일찍 부친을 잃고 아홉 살 때 모친을 따라 상경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의 청계사에 들어가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수계하였다. 스님의 형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니, 모두 모친이 삼보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염불하였던 까닭에 두 아들을 출가시킨 것이었다.통합뷰어스님은 나이가 아직 어릴 때에도 뜻은 마치 거인巨人과 같아서 아무리 곤고困苦한 일을 만나도 지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 늘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 밥을 지어 스승을 섬기느라 열네 살이 될 때까지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다.통합뷰어그런데 마침 한 선비가 청계사에 와서 함께 여름 한철을 보내게 되었다. 그 선비가 절에 와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스님을 불러 곁에 앉혀 놓고 『천자문』을 가르쳐 보았더니 배우는 족족 곧바로 외웠다. 또 『통감』·『사략』 등의 책들을 가르쳤더니 하루에 대여섯 장씩 외웠다. 그 선비가 탄식하기를, “이 아이는 참으로 비상한 재주이다. 옛날에 이른바 ‘천리마가 백락伯樂을 못 만나 소금수레를 끈다’329)라는 격이로구나. 훗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일체중생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통합뷰어그리고 얼마 뒤 계허 스님은 환속하면서 스님의 재주와 학문을 성취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겨 추천하는 편지를 써서 스님을 계룡산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에게 보냈다. 만화 스님은 당대에 뛰어난 강백이었다통합뷰어만화 스님은 영특한 스님을 보고 기뻐하면서 가르쳤는데 몇 달이 안 되어 글을 잘 짓고 경전의 뜻을 새길 줄 알아 일과로 배우는 경소經疏를 한번 보면 곧바로 외웠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잠자고도 이튿날 논강할 때 글 뜻을 풀이하는 것이 마치 도끼로 장작을 쪼개고강사가 잠이 많음을 꾸짖고는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특별히 『원각경』 중에서 소초疏抄 5, 6장 내지 10여 장을 일과로 정해 주었는데, 스님은 여전히 잠을 자고도 종전처럼 외니, 대중이 모두 미증유한 일이라고 탄복하였다.통합뷰어이로부터 재명이 높이 드러났고 영남과 호남의 강원들에 두루 가서 공부하니, 학문은 날로 높아지고 견문은 날로 넓어져 유가와 노장의 글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통합뷰어스님은 천성이 소탈하여 겉치레를 꾸미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 경을 볼때 대중들은 모두 가사 장삼을 걸치고 단정히 앉아 땀을 흘리며 고생을 참고 있는데, 스님은 홀로 옷을 벗고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강사인 일우一愚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문인들에게 “참으로 대승 법기大乘法器이니, 너희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23세에 스님은 대중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강석을 열어 교의敎義를 강론함에 드넓은 물결처럼 거침없으니, 사방의 학인들이 몰려왔다.통합뷰어하루는 지난날 계허 스님이 자신을 보살피고 아껴 주었던 정의情義가 생각나서 한번 찾아가 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대중에게 말한 후 출발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통합뷰어스님은 급히 발걸음을 옮겨 어느 집 처마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내쫓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집으로 옮겨 가도 마찬가지였다. 온 동네 수십 집 모두 몹시 다급하게 내쫓으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역질이 크게 창궐하여 걸리는 자는 곧바로 죽는다.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라고 하였다.통합뷰어스님은 문득 이 말을 듣고는 모골이 송연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흡사 죽음이 눈앞에 임박하고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어 일체 세간의 일들이 모두 덧없는 꿈 저편의 청산인 것만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해 말하기를, “이 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 받지 않고 조사의 도를 찾아서 삼계를 벗어나리라.”라고 하였다.통합뷰어발원을 마치고 평소에 읽은 공안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교학을 공부한 습성으로 모두 알음알이가 생겨 참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영운 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마사도래화驢事未去馬事到來話’331)만은 마치 은산철벽을 마주한 것처럼 도무지 알 수 없기에 곧바로 “이 무슨 도리인고?”라고 참구하였다.통합뷰어계룡산에 돌아온 뒤 대중을 해산하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 따라 잘 가시게. 나의 지원志願은 여기(講學)에 있지 않네.” 하고는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전심으로 화두를 참구하였다. 밤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하고, 시퍼렇게 간 칼을 턱밑에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석 달을 지나자 참구하는 화두가 순일무잡해졌다.통합뷰어한 사미승이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는데 속성은 이씨李氏였다. 그의 부친이 다년간 좌선하여 스스로 개오한 곳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이 처사라 불렀다. 그 사미승의 스승이 마침 이 처사의 집에 가서 이 처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통합뷰어이 처사가 “중이 된 자는 필경 소가 되지요.”라고 하니, 사미승의 스승이 “중이 되어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하고 단지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 그 시은을 갚게 마련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처사가 그 말을 듣고 꾸짖기를, “소위 사문으로서 이처럼 맞지 않은 대답을 한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사미승의 스승이 “나는 선지禪旨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겠소?” 하니, 이 처사가 “어찌하여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고 말하지 않소?”라고 하였다.통합뷰어그 사미승의 스승이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서 사미승에게 “너의 부친이 이와 같은 말을 했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라고 하니, 사미승이 “지금 조실 스님이 매우 열심히 참선하느라 폐침망찬廢寢忘餐하고 있으니, 이 이치를 아실 것입니다. 스님께서 가셔서 물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통합뷰어그 스승이 흔연히 가서 경허 스님과 수인사를 마치고 이 처사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는데,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스님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문득 깨달아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소식이 눈앞에 활짝 드러났다. 이에 대지大地가 가라앉고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 곧바로 고인古人이 크게 쉰 경지에 이르러 백천 가지 법문과 한량없는 묘의妙義가 당장에 빙소와해氷消瓦解 하듯이 풀렸다. 때는 고종 16년 기묘년(1879) 겨울 11월 보름께였다.통합뷰어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에 가득한 흰 눈과 달빛이라 높은 산 흐르는 시냇가 소나무 아래에서 긴긴 밤 맑은 하늘 아래 무슨 할 일이 있으리오. 이는 참으로 “이 도리는 너의 경계가 아니니, 도가 같은 이라야 비로소 안다.”라고 한 경계이다. 스님은 방장실에 한가로이 누워서 남들이 출입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화 강백이 들어왔는데도 역시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만화가 “무슨 까닭에 늘 누워서 일어나지 않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라고 하였다. 만화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통합뷰어이듬해 경진년 봄, 연암산燕巖山 천장암天藏庵에 와서 머물렀으니, 속가의 형인 태허 선사太虛禪師가 모친을 모시고 이 암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지은 ≺오도송≻과 ≺오도가≻가 있는데 증오證悟한 경지를 드러내 밝힌 것이 우뚝 높아 천 길 벼랑 같고, 드넓고 커서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니, 실로 옛 조사의 가풍에 손색이 없다.통합뷰어그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통합뷰어忽聞人語無鼻孔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자頓覺三千是我家           문득 삼천세계가 나임을 깨달았노라.六月燕巖山下路           유월이라 연암산 아랫길에野人無事太平歌           농부들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통합뷰어그 ≺오도가≻에는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구나.(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라는 네 구절을 첫머리에 얹고 끝마무리로 썼으니, 이는 사우師友의 연원이 이미 끊어져 자신의 오도悟道를 인증하고 법을 전해 줄 사람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통합뷰어스님은 일찍이 대중에게 말씀하셨다.통합뷰어“조종祖宗 문하에서 심법을 전수해 온 것은 근본이 있고 근거가 있으니, 착란해서는 안 된다. 옛날 황벽黃蘗은, 마조馬祖가 할喝한 기연을 백장百丈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도를 깨달아 백장의 법을 이었고, 흥화興化는, 대각大覺의 방棒 아래에서 임제臨濟가 방을 맞은 소식을 깨달아 임제가 입멸한 뒤에 임제의 법을 이었으며, 우리 동국에서는, 벽계碧溪가 중국에 들어가 총통總統에게 법을 얻고 와서 멀리 구곡龜谷의 법을 이었고, 진묵震黙이, 응화應化한 성인으로서 서산西山이 입멸한 뒤에 서산의 법을 이었다. 그 스승과 제자가 서로 법을 이음이 이처럼 엄밀한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인증하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증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통합뷰어오호라! 후대로 내려와 성인의 시대와 멀어짐에 그러한 도는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혹 본색납자本色衲子가 나와서 살활殺活의 화살로 한 개나 반 개의 성인을 쏘아서 얻는다. 그러므로 은연중에 저 바른 종지를 지키는 것이 마치 어둠 속에 등불을 얻고 숨이 끊어졌다 다시 소생하는 것과 같다.통합뷰어나는 비록 도는 부족하고 성품은 행검行檢이 없지만 일생 동안 지향한 바는 기필코 이 일착자一着子훗날 나의 제자는 응당 나를 용암 장로龍巖長老에게서 법을 잇도록 하여 도통의 연원을 바로잡고 만화 강백으로서 내가 수업한 스승을 삼도록 하라.”통합뷰어이제 그 유교遺敎에 따라 법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보면, 스님은 용암 혜언龍巖慧彦(1783~?)을 이었고, 용암 혜언은 금허 법첨錦虛法沾을 이었고, 금허 법첨은 율봉 청고栗峯靑杲를 이었고, 율봉 청고는 청봉 거안靑峯巨岸을 이었고, 청봉 거안은 호암 체정虎巖體淨(1687~1748)을 이었으며, 청허淸虛(1520~1604)는 편양鞭羊(1581~1644)에게 전하고, 편양은 풍담楓潭(1592~1665)에게 전하고, 풍담은 월담月潭(1632~1704)에게 전하고, 월담은 환성煥惺(1664~1729)에게 전하였으니, 스님은 청허에게 12세손이 되고, 환성에게 7세손이 된다.통합뷰어스님은 호서에 22년 동안 오래 머물렀으니, 서산瑞山의 개심사와 부석사, 홍주洪州의 천장암天藏庵이 모두 스님이 살면서 도를 닦던 곳들이다.기해년 가을, 영남의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 주석하였으니, 때는 고종 광무光武 3년(1899)이었다. 칙지勅旨가 내려 장경을 인쇄하는 한편 수선사修禪社를 세워서 선객들을 거주하게 했는데, 대중이 모두 스님을 추대하여 종주宗主로 삼았다.통합뷰어스님은 법좌에 올라 본분 도리를 곧바로 보이며 백념白拈333)의 수단을 써서 살활의 기용機用을 떨치니, 금강왕의 보검이요 사자의 위세라 할 만하였다. 설법을 듣는 이들이 모두 사견이 없어지고 집착이 사라져 씻은 듯 깨끗하기가 마치 뼈를 바꾸고 내장을 씻어내는 것 같았다.통합뷰어결제 때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려치고 이르시기를,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 노스님들이 모두 여기에 있도다.” 하고, 또 주장자를 들어서 허공을 한 번 긋고는 이르기를,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천하의 선지식 노스님들이 이를 따라갔도다. 대중은 도리어 알겠는가?” 하고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주장자를 던지고 법상에서 내려왔다.통합뷰어한 승려가 묻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모든 거동을 옛길에서 드날려 초연悄然한 기틀에 떨어지지 않는다’334) 하였으니, 어떠한 것이 옛길입니까?”라고 하니, 스님이 답하기를, “옛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평탄한 길이고, 하나는 험준한 길이다. 어떤 것이 험준한 길인가? 가야산 아래 천 갈래 길에 거마車馬가 때때로 마음대로 오고 간다. 어떤 것이 평탄한 길인가? 천 길 깎아지른 벼랑에 오르는 사람 없는데 오직 잔나비만이 거꾸로 나무에 오른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하안거 해제 때 법좌에 올라 동산洞山이 시중示衆하기를, “초가을 늦여름에 형제들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니, 모쪼록 만 리에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가라.”라고 한 것을 들어서 말하기를,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초가을 늦여름에 형제들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니, 길 위에 난 잡초들을 일일이 밟고 가라고 하겠다. 동산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라고 하니, 대중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거늘, 잠시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대중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니, 내가 스스로 대답하겠다.” 하고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갔다.통합뷰어직절直截하게 법을 들어 보이는 것이 대개 이상과 같았다.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호남湖南의 화엄사華嚴寺와 송광사松廣寺 등이 모두 스님의 발길이 머물던 곳들이다. 이후로 사방에서 선원禪院을 다투어 설치하였고, 발심發心한 납자들도 보고 느껴서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니, 시순時順335) 사이에 부처님의 광명을 맑게 씻고 사람들의 안목을 밝게 틔운 것이 이처럼 성대한 적이 없었다.통합뷰어임인년(1902) 가을, 스님은 범어사 금강암에 주석하고 있었다. 그 고을 동쪽에 있는 마하사에 나한개분불사羅漢改粉佛事336)가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로 초청하였다. 스님이 밤이 이슥해서야 절의 동구에 이르렀는데 칠흑처럼 캄캄해 길을 갈 수 없었다. 마하사 주지 스님이 잠깐 앉아서 조는데, 한 노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큰스님이 오셨으니 속히 나가 영접하라.” 하였다. 주지 스님이 꿈을 깨고 횃불을 들고 동구로 내려가니 과연 스님이 와 있었다. 비로소 나한이 현몽했음을 알고 대중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대중이 모두 기이한 일이라 놀랐고, 종전에 스님을 훼방하고 믿지 않던 이들이 모두 스님에게 와서 참회하였다.통합뷰어계묘년(1903) 가을,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다가 도중에 한 절구를 읊었다.통합뷰어識淺名高世危亂           식견은 얕고 이름은 높고 세상은 위태하니不知何處可藏身           모르겠구나, 어느 곳에 몸을 숨길 수 있을지.漁村酒肆豈無處           어촌과 주막에 어찌 그런 곳 없으랴만但恐匿名名益新           이름 감출수록 더욱 이름이 날까 두렵구나.통합뷰어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니,337) 스님의 뜻이 자신을 숨겨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통합뷰어이듬해 갑진년(1904) 봄에, 스님은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군安邊郡 석왕사에 이르렀다. 마침 석왕사에 오백나한 개분불사가 있어 제방의 대덕스님들이 법회에 와서 함께 증명법사가 되었다. 스님이 단상에 올라 독특한 변재로 설법하니 법회에 모인 대중이 합장하고 희유한 일이라 찬탄하였다. 법회를 회향한 뒤 스님은 종적을 감추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통합뷰어그리고 10년 뒤 수월水月 스님이 예산군 정혜선원定慧禪院으로 편지를 보내오기를, “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을 입고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를 오가면서 마을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들기도 하다가 임자년(1912) 봄,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 서재에서 입적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공滿空, 혜월慧月 두 사형이 곧바로 그곳으로 가서 널을 모셔다 난덕산蘭德山에서 다비하고 임종 때 쓴 게송을 가지고 돌아왔으니, 바로 스님이 입적한 이듬해 계축년(1913) 7월 25일이었다.통합뷰어그 동네 부로父老들에게 들으니,스님이 하루는 울타리 아래 앉아서 학동들이 호미로 풀을 매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누워 일어나지 못하면서 ‘내가 몹시 피곤하다’ 하기에 사람들이 부축하여 방 안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는 음식을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신음하지도 않고 다리를 뻗고 줄곧 누웠다가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이르러 문득 일어나 붓을 잡고서,통합뷰어心月孤圓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光呑萬像              그 빛이 만상을 삼키도다.光境俱亡              빛과 경계가 다 없어지면復是何物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338)통합뷰어라는 게송을 쓰고 말미에 일원상 ‘○’을 그리고는 붓을 놓고 우협右脇으로 누워 그대로 천화遷化하였으니, 때는 임자년 4월 25일이었다. 우리들이 예를 갖추어 어느 산에 장사지냈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오호라, 슬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실로 만겁토록 만나기 어려운데 우리들은 비록 잠시 친견했으나 오래 모시고 배우지 못했으며, 입적하시는 날에는 옛 도인들이 입적할 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곁에서 모시고 유지遺旨를 받아 후사를 결정하지 못했으니, 여한이 끝이 있겠는가!통합뷰어스님은 정사년에 태어나 임자년에 입적하였으며 9세에 출가하였으니, 향년은 56세이고, 법랍은 48세이다. 수법제자受法弟子 네 사람이 있다. 침운 현주枕雲玄住는 영남 표충사表忠寺에서 법을 펴다가 범어사에서 임종할 때 설법하고 게송을 쓰고 천화하였다. 혜월 혜명慧月慧明과 만공 월면滿空月面 두 선백禪伯은 어릴 때부터 스님을 모셔서 스님의 종지宗旨를 깊이 얻어 각각 한 지방의 스승이 되어서 후학을 제접하여 교화를 크게 펴고 있다. 불민한 나도 일찍이 스님을 찾아뵙고 선지禪旨를 들었는데, 단지 선사先師께서 나를 위해 설파해 주시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하므로 감히 그 법은을 저버리지 못한다.339) 이상이 네 사람이다.통합뷰어대저 행장이란 사실을 기록하고 허위로 쓰지 않는 법이다. 스님의 오도와 법을 편 인연은 진실로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스님의 풍모와 생활 모습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통합뷰어신장은 크고 고인古人의 풍모를 갖추었으며, 뜻과 기운은 과감하고 음성은 큰 종소리 같았으며, 무애변재를 갖추었으며, 세상의 일체 비방과 칭찬에 동요하지 않음이 산과 같아서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어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래서 술과 고기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었으며, 여색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 아무런 걸림 없이 유희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했다. 이는 이통현李通玄340)을 증득하여 자유로이 초탈한 삶을 산 것이 아니겠는가.통합뷰어아니면 때를 만나지 못하여 하열한 사람의 자리에 자신을 숨긴 채 자신을 낮추고 도를 스스로 즐긴 것이 아니겠는가.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큰 뜻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 크게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통합뷰어스님의 시에서,통합뷰어酒或放光色復然           술도 혹 방광하고 여색도 그러하니貪嗔煩惱送驢年           탐진치 번뇌 속에서 나귀의 해를 보내노라.佛與衆生吾不識           부처와 중생을 나는 알지 못하노니平生宜作醉狂僧           평생토록 술 취한 중이나 되어야겠다.통합뷰어라 하였으니, 스님의 일생 삶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이다.통합뷰어그러나 안거할 때는, 음식은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 먹었고, 종일토록 문을 닫고 앉아서 말없이 침묵하며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큰 도회지에 나가 교화를 펴기를 권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내게 서원이 있으니, 발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우뚝하고 꿋꿋한 풍모가 이와 같았다.통합뷰어천장암에 살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더운 여름에도 한 벌 누더기를 갈아입지 않아 모기와 파리가 온몸을 에워쌌고, 이와 서캐가 옷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물어뜯어 피부가 다 헐었는데도 고요히 움직이지 않은 채 산악처럼 앉아 있었다. 하루는 뱀이 몸에 올라가 어깨와 등을 꿈틀꿈틀 기어갔다. 곁에 있던 사람이 보고 깜짝 놀라 말해 주었으나 태연히 개의치 않으니, 조금 뒤 뱀이 스스로 물러갔다. 마음이 도와 합일한 경지가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통합뷰어한번 앉아서 여러 해를 찰나처럼 보내더니, 하루는 절구 한 수를 읊었다.통합뷰어世與靑山何者是           속세와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春城無處不開花           봄이 오매 어느 곳이건 꽃이 피는 것을.傍人若問惺牛事           누가 나의 경지를 묻는다면石女心中劫外歌           돌계집 마음속 겁외가라 하리라.통합뷰어그리고는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꺾어서 문 밖에 집어 던지고 훌쩍 산을 나와서 곳곳마다 다니면서 교화를 펴되, 형식이나 규율의 굴레를 벗어났다.통합뷰어때로는 저잣거리를 유유자적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어울리고 때로는 산속의 솔 그늘 아래 누워 한가로이 풍월을 읊음에 그 초일超逸한 경지를 사람들은 헤아려 알 수 없었으며, 때로 설법할 때는 지극히 온화하고 지극히 자상하여 부사의不思議한 묘지妙旨를 설명하였으니, 선도 철저하고 악도 철저하여 수단修斷으로써 수단할 수 없는 경지341)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스님은 문장과 필법도 모두 뛰어났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위대한 인물이었다.통합뷰어아! 출가한 사람들이 모두 스님과 같이 용맹하게 나아가고 큰 걸음을 걸어서 일대사를 해결하여 법등을 이어 밝힌다면, 신라 구산선문의 융성한 교화와 고려 십육 국사의 법통이 어찌 그 옛날에만 있던 일이리오. 교화를 높이고 법통을 이을 뿐만이 아니라 일체중생의 근본지根本智 광명종자光明種子를 이 오탁五濁 세계 중에서 길이 단절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터이니, 어찌 “깊은 마음으로 진찰塵刹의 중생들을 받드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님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하네.”342)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향을 사르고 깊이 축원하는 까닭이다.통합뷰어그러나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이 스님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스님의 행리를 배워서는 안 되니, 사람들이 믿되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을 의지한다는 것은 참되고 바른 묘법을 의지하는 것이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율의律儀와 불률의不律儀343)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본받는 것이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득실과 시비를 보지 않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필경에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남의 득실과 시비 따위야 말할 게 있겠는가.통합뷰어그러므로 『원각경』에서는,말세의 중생으로서 발심 수행하는 이는 응당 일체 바른 지견을 갖춘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형상에 머무르지 않아 비록 진로塵勞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그 마음은 항상 청정하고, 잘못한 모습을 보이지만 범행梵行을 찬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불률의에 들어가지 않게 한다. 이런 사람을 찾아 만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 그 선지식이 행주좌와 사위의四威儀에 늘 청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며 갖가지 잘못된 행실을 나타내어 보일지라도 중생들이 그 선지식에 대해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없어야 하고 나쁜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통합뷰어하였으며, 『금강경』에서는,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한다.통합뷰어하였으며, 보조 국사는,무릇 참학하는 사람은 처음 출발할 때 먼저 정인正因344)을 심어야 하니, 오계·십선·사성제·십이인연·육도 등의 법은 모두 정인이 아님을 믿고,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인 줄 믿어서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으면 3아승지겁이 공空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믿는 것이 바로 정인이다.통합뷰어하였다. 따라서 계율·사성제·십이인연·육도 등의 법도 외려 정인이 아닌데, 하물며 불률의야 말할 나위 있으리오. 그러므로 단지 바른 지견을 갖춘 사람을 찾아서 자기의 청정한 도안道眼을 결택해야지, 망령되게 삿된 믿음을 구하여 자신의 대사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통합뷰어또 고덕이 이르기를,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345)·수증修證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통달하게 할 뿐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말들은 정안正眼이 열림을 우선하고, 행리를 논함을 뒤로 한 게 아니겠는가.통합뷰어그래서 내가 “스님의 법화를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스님의 행리를 배워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이니, 이는 단지 법을 간택하는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무애한 행리만 본받는 자들을 꾸짖는 것이며, 또 유위有爲의 상견相見에 갇혀서 마음의 근원을 통철하지 못하는 자를 경책하는 것이다. 만약 법을 간택하는 바른 안목을 갖추고 마음의 근원을 통철했다면 행리가 자연히 진리에 맞아서 행주좌와 사위의에 항상 청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게 될 터이니, 어찌 겉모습에 현혹되어 미워하고 좋아하며, 나다 남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리오.통합뷰어경오년(1930) 겨울에 만공滿空 사형이 금강산 유점사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오대산으로 서찰을 보내어 나에게 선사의 행장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본래 문장을 익히지 못했으나 선사의 행장은 감히 짓지 않고 말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 사적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보이노니, 한편으로는 말법 세상에서 진정한 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하여 법을 편 부사의不思議한 공덕을 찬탄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사문이 망령되게 집착하여 밖으로 치달려서 헛되이 세월을 보냄으로써 부처님의 교화를 손상하는 잘못을 경계한다. 그리고 선사의 시와 기문 약간 편을 도반 선객들에게 부쳐 보내 초록하고 인쇄하여 세상에 유포되게 하노라.통합뷰어불기佛紀 2958년 신미년 3월 15일에 문인門人 한암 중원漢巖重遠은 삼가 찬술하다.
盖發勇猛志徹法根源者。末法不無。故佛祖垂如是言。又罕有其人。慧命難保。故有如是言。孰能於此。具丈夫之志。而徹悟自性。成就其第一功德。而以大智慧光明義。廣大流通於後五百歲後也哉。繫我先師鏡虛和尙是也。

和尙諱惺牛。初名東旭。鏡虛其號。俗姓宋。驪山人。考諱斗玉。妣密陽朴氏。以哲宗八年丁巳四月二十四日。生于全州之子東里。分娩後三日不啼。及浴身。始發兒聲。人皆稱神異焉。早喪所怙。九歲随慈母上京。投廣州淸溪寺。依桂虛師。祝發受戒。而有兄在公州麻谷寺得度。皆其慈母歸心三寶。念佛誠勤。故捨二子爲出家也。年尙幼。而志若巨人。雖遇困苦。無疲厭心。負薪汲水。化飯供師。年至十四。不遑學文。適有一儒者来同過夏。而以渠之僑居消遣。招坐其傍。試授以千字文。随學輒誦。又敎以通史等書。日誦五六紙。嘆曰。此兒眞非常才也。古所謂千里之驪。不遇伯樂。困於塩車也。他日必成大器。救度一切人去矣。居無何。桂虛師還俗。惜其才学而未就。馳書薦送於鷄龍山東鶴寺萬化和尙。和尙即當世講匠也。見其氣宇英拔。喜而提誘。不幾月。善属文。討教意。日課經䟽。一覽便誦。終日打睡。而翌日論問時。其消釋文義。若析『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3a01-a23)
薪秉燭。講師責其多睡。而欲試其才。特㝎課於圓覚經中䟽抄並五六紙乃至十餘紙。亦如前睡。而誦亦如之。衆皆嘆其未曾有也。自此才名高著。遍叅嶠湖講院。学日進而聞益博。至於儒典莊老。莫不精通。天性踈闊。外無苟餙。盛炎看經。衆皆着衣正坐。不勝苦汗。獨破脫自若。不事形儀。一愚講師見之。謂門人曰。真大乗法器也。汝軰不及。二十三歲。以衆望開講於東鶴寺。論教義。波爛洋洋。四方学者多歸之。一日思其前日桂虛師眷愛之義。而欲一訪問於其廬。遂告衆發行。至中路。忽風雨暴至。急步入一家簷頭。則迫逐不受。移徃他家而亦然。一洞數十家。皆逐之甚急。而高聲呵責曰。方今此處。癘疫大熾。染者立死。汝何人入於死地。和尙忽聞其言。毛骨竦然。心神恍惚。恰似箇大限當頭。命在呼吸間。一切世間。都是夢外靑山。仍自念言。此生寧爲痴呆漢。不爲文字所拘繫。叅尋祖道。超出三界。發願已。推念其平日所讀公案。以義学習性。皆生知解。無叅究分。唯靈雲禪師所示驢事未去馬事到来話。解之不得如撞着銀山鉄壁。即看是甚道理。還山後。遂散衆曰。君等随緣好去。我之志願。不在此。閉門端坐。專心究看。夜欲將睡。引錐刺股。或磨刀當頣。如是過三箇月。所看話頭。純一無雜。有一沙彌近侍。俗姓李。其父坐禪多年。自有開悟處。人皆號爲李處士。沙彌之師傅者。適徃其家。與處士談話次。處士曰。爲僧者。畢竟爲牛。其師曰。爲僧而未明心地。但受信施。則必爲牛而償其施恩。處士呵曰。所謂沙門而答話如是不諦當乎曰。我不識禪旨。如何答之即是。處士曰。何不道爲牛則爲無『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3b01-b24)
穿鼻孔處。其師默然而歸。謂沙彌曰。汝之嚴父有如是說話。而我都不知其什麽意旨。沙彌曰。今籌室和尙。做禪甚緊。廢寢忘餐。當知是理。願師傅徃問之。其師欣然而去。禮畢而坐。傳李處士之言。到牛無鼻孔處。和尙眼目定動。撞發古佛未生前消息。豁爾現前。大地平沈。物我俱忘。直到古人大休歇之地。百千法門無量妙義。當下氷消瓦觧。時則高宗十六年己卯冬十一月望間也。心外無法。滿目雪月。高岑流水長松下。永夜淸霄何所爲。眞可謂這箇道理。非汝境界。同道方知。遂高卧方丈。不關人之出入。萬化講師入見。亦卧而不起。講師曰。何故長卧不起。對曰。無事之人。本来如是。講師無言而退。翌年庚辰春。來住於燕岩山天蔵庵。兄太虛禪師奉慈母在此故也。有頌與歌。發揮其悟證處。嶷嶷然崖岸千尋。蕩蕩然名言俱絶。實不讓於古祖師家風矣。其頌曰。忽聞人於無鼻孔。頓覺三千是我家。六月燕岩山下路。野人無事太平歌。其歌有四顧無人。衣鉢誰傳。衣鉢誰傳。四顧無人之四句。冠於首。結於尾。此深嘆其師友淵源已絶。無印證相受處也。嘗示衆曰。夫祖宗門下。心法傳授。有本有㨿。不可錯亂。昔黃蘗聞百丈擧馬祖喝而悟道。嗣百丈。興化於大覺棒下。悟臨濟喫棒底消息。嗣臨濟於滅後。我東國。碧溪入中國。得法於緫統而來。遠嗣龜谷。震默以應化聖。嗣法於西山滅后。其師資相承。嚴密如此者。蓋在於以心印心心心即相印也。嗚呼。時降聖遠。其道已廢。然間有本色衲子興起。以殺活箭。射得一介半介聖人。故隱隱地扶持他正宗来。如暗得燈。似絶復生。余雖道未充而性不檢。一生所向。期『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4a01-a24)
在於此一着子明白。而今老矣。日後我弟子。當以我嗣法於龍岩長老。以整其道統淵源。而以萬化講師爲我之受業師。可也。今遵遺教。而泝法源流。則和尙嗣龍岩慧彦。彦嗣錦虛法沾。沾嗣栗峰靑果。果嗣靑峰巨岸。岸嗣虎岩軆淨。而淸虛傳之鞭羊。鞭羊傳之楓潭。楓潭傳之月潭。月潭傳之喚惺。和尙於淸虛。爲十一世孫。而於喚惺。爲七世孫也。久住湖西二十餘年。瑞山之開心。浮石。洪州之天藏。皆捿息鍊道處也。己亥秋。移錫于嶺南伽倻山海印寺。時高宗光武三年也。有勅旨印經。又建修禪社。居心學者。而衆皆推和尙爲宗主。陞座舉揚。直示本分。用白拈手。振殺活機。可謂金剛寶釰。獅子全威。聞者皆見亡執謝。洒然若換骨洗膓矣。結制上堂。拈柱杖一下云。三世諸佛歷代祖師天下善知識老和尙。總在這裏。又一卓劃来云。三世諸佛歷代祖師。又一卓劃去。三世諸佛歷代祖師天下善知識老和尙。總随去也。天下善知識老和尙。總随去也。大衆還會麽否。衆無對。擲柱杖下座。僧問。古云。動容揚古路。不墮悄然機。如何是古路。答。古路有二。一坦路。一險路。如何是險路。伽倻山下千岐路。車馬時時任徃來。如何是坦路。千尋絶璧無人到。惟有猢猻倒上來樹。解夏上堂。擧洞山示衆云。秋初夏末。兄弟東去西去。直須向萬里無寸草處去。余則不然。秋初夏末。兄弟東去西去。路上雜草。一一踏着始得。與洞山語。是同別。衆無對。良久云。衆已無對。余自對去。便下座歸方丈。其直截提示。類皆如此。而鷲山之通度。金山之梵魚。湖南之華嚴松廣。皆和尙遊歷處也。自后禪院四方爭設。發心衲子。亦觀感而雲興。時順間。洗佛『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4b01-b25)
光明。開人眼目。未有如此之盛也。壬寅秋。和尙住梵魚寺金剛庵。邑之東摩訶寺。有羅漢改粉佛事。而淸和尙以作證。夜暮抵寺洞口。路黑難進。寺之主僧。忽坐睡。一老僧告曰。大和尙來也。急出迎之。主僧夢覺。執炬下洞口。果和尙來矣。始知羅漢之現夢。告于衆。衆皆驚異。前有毁謗不信者。皆來懴悔焉。癸卯秋。自梵魚寺徃海印。途中有口號一絶。識淺名高世危亂。不知何處可藏身。漁村酒肆豈無處。但恐匿名名益新。盖詩言志。可知其志在韜晦惟求人不識也。翌年甲辰春。入五臺。歷金剛。到安邊郡釋王寺。適有五百羅漢改粉佛事。而諸方碩德。皆來法會。共作叅證。和尙臨壇。唱獨能之辯。一衆合掌。呈希有之嘆。回向後潛跡。不知所徃矣。十年後。自水月和尙。書信來付於禮山郡定慧禪院。即和尙長髮服儒来徃於甲山江界等地。或村齋訓蒙。或市街啣盃。壬子春。在甲山熊耳坊道下洞書齋入寂云。慧月滿空兩師兄。直入其地。奉柩就蘭德山闍維。得臨終時書偈而還。即和尙入滅後翌年癸丑七月二十五日也。聞諸其洞中父老。和尙一日坐籬下。看学童鋤草。忽卧而不起曰。予甚困也。衆人扶入房內。不食不言。又不呻吟。伸脚而卧。至翌日藜明。忽起坐。拈筆書偈曰。心月孤圓。光呑萬像。光境俱亡。復是何物。尾作一圓相○。因投筆。右脇而卧。奄然遷化。時壬子四月二十五日也。我等備禮。葬於某山云。嗚呼哀哉。大善知識出世。實萬劫難遇。而吾儕雖暫得親見。未能久侍叅学。歸寂之日。又未得『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5a01-a24)
叅決後事。如古道人入滅之時。餘恨可旣。和尙生於丁巳。寂於壬子。九歲出家。壽五十有六。臘四十有八。有受法第子四人。曰枕雲玄住。行道於嶺南表忠寺。而臨終在梵魚寺。說法書偈而化。曰慧月慧明曰滿空月面兩禪伯。自妙年叅侍。深得和尙宗旨。各爲一方師。提接方来。其化大行。而余雖不敏。亦曾參聽玄旨。而只重先師不爲我說破。故不敢辜負其法恩。是爲四也。夫行狀者。記其實。不以虛也。和尙之悟道揚化因緣。誠如上言。若論其行履。則身長貌古。志氣果强。聲若洪鍾。具無碍辯。對八風。不動如山。行則行。止則止。不爲人之打之遶。故飮啖自由。聲色不拘。曠然遊戱。招人疑謗。此乃以廣大心。証不二門。超放自如。如李通玄宗道者之類乎。抑亦不遇而慷慨。藏身於下劣之地。以卑自牧而以道自樂歟。非鴻鵠。難知鴻鵠之志。非大悟。安能不拘於小節哉。和尙詩有酒或放光色復然。貪嗔煩惱送驢年。佛與衆生吾不識。平生宜作醉狂僧之句。寫出其一生行履也。然其安處也。食纔接氣。掩關終日。沈然寡言。不喜見人。人或勸揚化於大都會。則曰。吾有誓願。足不踏京城之地。其卓越勁挺。盖如此。住天蔵庵時。一領鶉衣。寒暑不改。蚊蚋繞身。虱兒滿衣。晝宵侵囓。肌膚瘡爛。寂然不動。坐如山嶽。一日。有蛇上身。蟠蜿於肩背。傍人驚告。叅然無心。小焉蛇自引去。非與道凝精。孰如是哉。一坐多年。如經刹那。一朝有吟。一絶曰。世與靑山何者是。春城無處不開花。傍人若問惺牛事。石女聲半刼亦歌。遂拗折柱杖。擲於門外。翩『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5b01-b24)
然出山。随方宣化。脫略窠印。不存軌則。或懶遊城序。混同塵俗。或閑卧松亭。嘯傲風月。其超適之趣。人莫能測。有時垂示。則極柔和。甚精細。演不可思議之妙旨。可謂善到底惡到底。不可以修断而修断也。文章筆法。皆過於人。真希世偉人也。噫。出家之人。皆如和尙勇進濶步。而辦明大事。燈燈相續。則九山隆化。十六継旣。豈獨專在於前昔也哉。非特隆化継統而已。抑亦使一切衆生根本智光明種子。永不断絶於五濁界中矣。豈非深心奉塵刹名爲報佛恩哉。吾所以焚香深祝者也。然後之学者。學和尙之法化則可。学和尙之行履則不可。人信而不解也。又依法者。依其真正妙法也。不依人者。不依其律儀與不律儀也。又依者。師而效之也。不依者。不見其得失是非也。学道之人。畢竟法亦能捨。况於人之得失是非乎。故圓覚經云。末世衆生發心修行者。當求一切正知見人。心不住相。雖現塵勞。心恒淸淨。示有諸過。讃嘆梵行。不令衆生入不律儀。求如是人。即得成就阿耨萻提。彼善知識。四威儀中。常現淸淨。乃至示現種種過惠。衆生於彼。心無憍慢。不起惡念。金剛經云。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是人行邪道。不能見如来。又普照國師云。夫叅学者。發足。先植正因。信五戒十善四諦十二因緣六度等法。皆非正因。信自心是佛。一念無生。三祇刼空。如是信得及。乃是正因。然則戒諦緣度等法。尙非正因。况於不律儀乎。故但求正知見人。決擇『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6a01-a24)
自已淸淨道眼。不可以妄求邪信。誤着大事也。又古德云。只貴眼正。不貴行履。又云。我之法門。不論禪定觧脫持犯修證。惟達佛之知見。此非先開正眼而後論行履耶。故曰。学和尙之法化則可。学和尙之行履則不可。此但責其未具擇法眼而先效其行履無碍者也。又策其局執於有爲相見。不能洞徹心源者也。若具擇法正眼而洞徹心源。則行履自然稱真。四威儀內。常現淸淨。安可爲外相之所幻惑。起愛憎人我之見也哉。庚午冬。滿空師兄在金剛山楡岾寺禪院祖堂。寄書於五抬山中。囑余述先師行狀。余本不閒於文辭。然其於先師行狀。不敢以已之。故記其事。以示後人。一以讃末法中真善知識出世弘法之難思功德。一以警吾軰之妄執外走而虛度時日以傷損佛化之過失焉。又以禪師之詩咏與記文若干篇。付同行諸禪和。抄錄印刷。行于世。佛紀二千九百五十八年辛未三月十五日。門人漢岩重遠謹撰。
대개 용맹스런 뜻을 일으켜 법의 근원을 사무치는 이가 말법 세상에도 없지 않았으므로 불조가 이런 말씀을 후세에 남겼던 것이고, 또 그만한 사람이 드물어 불조의 혜명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통합뷰어뉘라서 여기에서 장부의 뜻을 갖추고 자기 본성을 사무쳐 깨달아 가장 으뜸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 광명의 뜻을 후오백세의 세상에 널리 펼칠 수 있겠는가? 바로 우리 경허 스님이 그러한 분이다.
통합뷰어스님은, 휘는 성우惺牛이고 초명은 동욱東旭이며, 경허는 그 호이다. 속성은 송씨宋氏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부친은, 휘는 두옥斗玉이고 모친은 밀양密陽 박씨朴氏이다. 철종 7년328) 정사년(1857) 4월 24일에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분만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시킬 때에 비로소 울음을 터트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이한 일이라 하였다.통합뷰어스님은 일찍 부친을 잃고 아홉 살 때 모친을 따라 상경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의 청계사에 들어가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수계하였다. 스님의 형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니, 모두 모친이 삼보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염불하였던 까닭에 두 아들을 출가시킨 것이었다.통합뷰어스님은 나이가 아직 어릴 때에도 뜻은 마치 거인巨人과 같아서 아무리 곤고困苦한 일을 만나도 지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 늘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 밥을 지어 스승을 섬기느라 열네 살이 될 때까지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다.통합뷰어그런데 마침 한 선비가 청계사에 와서 함께 여름 한철을 보내게 되었다. 그 선비가 절에 와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스님을 불러 곁에 앉혀 놓고 『천자문』을 가르쳐 보았더니 배우는 족족 곧바로 외웠다. 또 『통감』·『사략』 등의 책들을 가르쳤더니 하루에 대여섯 장씩 외웠다. 그 선비가 탄식하기를, “이 아이는 참으로 비상한 재주이다. 옛날에 이른바 ‘천리마가 백락伯樂을 못 만나 소금수레를 끈다’329)라는 격이로구나. 훗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일체중생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통합뷰어그리고 얼마 뒤 계허 스님은 환속하면서 스님의 재주와 학문을 성취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겨 추천하는 편지를 써서 스님을 계룡산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에게 보냈다. 만화 스님은 당대에 뛰어난 강백이었다통합뷰어만화 스님은 영특한 스님을 보고 기뻐하면서 가르쳤는데 몇 달이 안 되어 글을 잘 짓고 경전의 뜻을 새길 줄 알아 일과로 배우는 경소經疏를 한번 보면 곧바로 외웠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잠자고도 이튿날 논강할 때 글 뜻을 풀이하는 것이 마치 도끼로 장작을 쪼개고강사가 잠이 많음을 꾸짖고는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특별히 『원각경』 중에서 소초疏抄 5, 6장 내지 10여 장을 일과로 정해 주었는데, 스님은 여전히 잠을 자고도 종전처럼 외니, 대중이 모두 미증유한 일이라고 탄복하였다.통합뷰어이로부터 재명이 높이 드러났고 영남과 호남의 강원들에 두루 가서 공부하니, 학문은 날로 높아지고 견문은 날로 넓어져 유가와 노장의 글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통합뷰어스님은 천성이 소탈하여 겉치레를 꾸미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 경을 볼때 대중들은 모두 가사 장삼을 걸치고 단정히 앉아 땀을 흘리며 고생을 참고 있는데, 스님은 홀로 옷을 벗고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강사인 일우一愚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문인들에게 “참으로 대승 법기大乘法器이니, 너희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23세에 스님은 대중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강석을 열어 교의敎義를 강론함에 드넓은 물결처럼 거침없으니, 사방의 학인들이 몰려왔다.통합뷰어하루는 지난날 계허 스님이 자신을 보살피고 아껴 주었던 정의情義가 생각나서 한번 찾아가 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대중에게 말한 후 출발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통합뷰어스님은 급히 발걸음을 옮겨 어느 집 처마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내쫓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집으로 옮겨 가도 마찬가지였다. 온 동네 수십 집 모두 몹시 다급하게 내쫓으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역질이 크게 창궐하여 걸리는 자는 곧바로 죽는다.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라고 하였다.통합뷰어스님은 문득 이 말을 듣고는 모골이 송연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흡사 죽음이 눈앞에 임박하고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어 일체 세간의 일들이 모두 덧없는 꿈 저편의 청산인 것만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해 말하기를, “이 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 받지 않고 조사의 도를 찾아서 삼계를 벗어나리라.”라고 하였다.통합뷰어발원을 마치고 평소에 읽은 공안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교학을 공부한 습성으로 모두 알음알이가 생겨 참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영운 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마사도래화驢事未去馬事到來話’331)만은 마치 은산철벽을 마주한 것처럼 도무지 알 수 없기에 곧바로 “이 무슨 도리인고?”라고 참구하였다.통합뷰어계룡산에 돌아온 뒤 대중을 해산하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 따라 잘 가시게. 나의 지원志願은 여기(講學)에 있지 않네.” 하고는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전심으로 화두를 참구하였다. 밤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하고, 시퍼렇게 간 칼을 턱밑에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석 달을 지나자 참구하는 화두가 순일무잡해졌다.통합뷰어한 사미승이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는데 속성은 이씨李氏였다. 그의 부친이 다년간 좌선하여 스스로 개오한 곳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이 처사라 불렀다. 그 사미승의 스승이 마침 이 처사의 집에 가서 이 처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통합뷰어이 처사가 “중이 된 자는 필경 소가 되지요.”라고 하니, 사미승의 스승이 “중이 되어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하고 단지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 그 시은을 갚게 마련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처사가 그 말을 듣고 꾸짖기를, “소위 사문으로서 이처럼 맞지 않은 대답을 한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사미승의 스승이 “나는 선지禪旨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겠소?” 하니, 이 처사가 “어찌하여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고 말하지 않소?”라고 하였다.통합뷰어그 사미승의 스승이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서 사미승에게 “너의 부친이 이와 같은 말을 했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라고 하니, 사미승이 “지금 조실 스님이 매우 열심히 참선하느라 폐침망찬廢寢忘餐하고 있으니, 이 이치를 아실 것입니다. 스님께서 가셔서 물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통합뷰어그 스승이 흔연히 가서 경허 스님과 수인사를 마치고 이 처사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는데,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스님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문득 깨달아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소식이 눈앞에 활짝 드러났다. 이에 대지大地가 가라앉고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 곧바로 고인古人이 크게 쉰 경지에 이르러 백천 가지 법문과 한량없는 묘의妙義가 당장에 빙소와해氷消瓦解 하듯이 풀렸다. 때는 고종 16년 기묘년(1879) 겨울 11월 보름께였다.통합뷰어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에 가득한 흰 눈과 달빛이라 높은 산 흐르는 시냇가 소나무 아래에서 긴긴 밤 맑은 하늘 아래 무슨 할 일이 있으리오. 이는 참으로 “이 도리는 너의 경계가 아니니, 도가 같은 이라야 비로소 안다.”라고 한 경계이다. 스님은 방장실에 한가로이 누워서 남들이 출입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화 강백이 들어왔는데도 역시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만화가 “무슨 까닭에 늘 누워서 일어나지 않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라고 하였다. 만화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통합뷰어이듬해 경진년 봄, 연암산燕巖山 천장암天藏庵에 와서 머물렀으니, 속가의 형인 태허 선사太虛禪師가 모친을 모시고 이 암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지은 ≺오도송≻과 ≺오도가≻가 있는데 증오證悟한 경지를 드러내 밝힌 것이 우뚝 높아 천 길 벼랑 같고, 드넓고 커서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니, 실로 옛 조사의 가풍에 손색이 없다.통합뷰어그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통합뷰어忽聞人語無鼻孔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자頓覺三千是我家           문득 삼천세계가 나임을 깨달았노라.六月燕巖山下路           유월이라 연암산 아랫길에野人無事太平歌           농부들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통합뷰어그 ≺오도가≻에는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구나.(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라는 네 구절을 첫머리에 얹고 끝마무리로 썼으니, 이는 사우師友의 연원이 이미 끊어져 자신의 오도悟道를 인증하고 법을 전해 줄 사람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통합뷰어스님은 일찍이 대중에게 말씀하셨다.통합뷰어“조종祖宗 문하에서 심법을 전수해 온 것은 근본이 있고 근거가 있으니, 착란해서는 안 된다. 옛날 황벽黃蘗은, 마조馬祖가 할喝한 기연을 백장百丈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도를 깨달아 백장의 법을 이었고, 흥화興化는, 대각大覺의 방棒 아래에서 임제臨濟가 방을 맞은 소식을 깨달아 임제가 입멸한 뒤에 임제의 법을 이었으며, 우리 동국에서는, 벽계碧溪가 중국에 들어가 총통總統에게 법을 얻고 와서 멀리 구곡龜谷의 법을 이었고, 진묵震黙이, 응화應化한 성인으로서 서산西山이 입멸한 뒤에 서산의 법을 이었다. 그 스승과 제자가 서로 법을 이음이 이처럼 엄밀한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인증하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증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통합뷰어오호라! 후대로 내려와 성인의 시대와 멀어짐에 그러한 도는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혹 본색납자本色衲子가 나와서 살활殺活의 화살로 한 개나 반 개의 성인을 쏘아서 얻는다. 그러므로 은연중에 저 바른 종지를 지키는 것이 마치 어둠 속에 등불을 얻고 숨이 끊어졌다 다시 소생하는 것과 같다.통합뷰어나는 비록 도는 부족하고 성품은 행검行檢이 없지만 일생 동안 지향한 바는 기필코 이 일착자一着子훗날 나의 제자는 응당 나를 용암 장로龍巖長老에게서 법을 잇도록 하여 도통의 연원을 바로잡고 만화 강백으로서 내가 수업한 스승을 삼도록 하라.”통합뷰어이제 그 유교遺敎에 따라 법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보면, 스님은 용암 혜언龍巖慧彦(1783~?)을 이었고, 용암 혜언은 금허 법첨錦虛法沾을 이었고, 금허 법첨은 율봉 청고栗峯靑杲를 이었고, 율봉 청고는 청봉 거안靑峯巨岸을 이었고, 청봉 거안은 호암 체정虎巖體淨(1687~1748)을 이었으며, 청허淸虛(1520~1604)는 편양鞭羊(1581~1644)에게 전하고, 편양은 풍담楓潭(1592~1665)에게 전하고, 풍담은 월담月潭(1632~1704)에게 전하고, 월담은 환성煥惺(1664~1729)에게 전하였으니, 스님은 청허에게 12세손이 되고, 환성에게 7세손이 된다.통합뷰어스님은 호서에 22년 동안 오래 머물렀으니, 서산瑞山의 개심사와 부석사, 홍주洪州의 천장암天藏庵이 모두 스님이 살면서 도를 닦던 곳들이다.기해년 가을, 영남의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 주석하였으니, 때는 고종 광무光武 3년(1899)이었다. 칙지勅旨가 내려 장경을 인쇄하는 한편 수선사修禪社를 세워서 선객들을 거주하게 했는데, 대중이 모두 스님을 추대하여 종주宗主로 삼았다.통합뷰어스님은 법좌에 올라 본분 도리를 곧바로 보이며 백념白拈333)의 수단을 써서 살활의 기용機用을 떨치니, 금강왕의 보검이요 사자의 위세라 할 만하였다. 설법을 듣는 이들이 모두 사견이 없어지고 집착이 사라져 씻은 듯 깨끗하기가 마치 뼈를 바꾸고 내장을 씻어내는 것 같았다.통합뷰어결제 때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려치고 이르시기를,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 노스님들이 모두 여기에 있도다.” 하고, 또 주장자를 들어서 허공을 한 번 긋고는 이르기를,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천하의 선지식 노스님들이 이를 따라갔도다. 대중은 도리어 알겠는가?” 하고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주장자를 던지고 법상에서 내려왔다.통합뷰어한 승려가 묻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모든 거동을 옛길에서 드날려 초연悄然한 기틀에 떨어지지 않는다’334) 하였으니, 어떠한 것이 옛길입니까?”라고 하니, 스님이 답하기를, “옛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평탄한 길이고, 하나는 험준한 길이다. 어떤 것이 험준한 길인가? 가야산 아래 천 갈래 길에 거마車馬가 때때로 마음대로 오고 간다. 어떤 것이 평탄한 길인가? 천 길 깎아지른 벼랑에 오르는 사람 없는데 오직 잔나비만이 거꾸로 나무에 오른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하안거 해제 때 법좌에 올라 동산洞山이 시중示衆하기를, “초가을 늦여름에 형제들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니, 모쪼록 만 리에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가라.”라고 한 것을 들어서 말하기를,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초가을 늦여름에 형제들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니, 길 위에 난 잡초들을 일일이 밟고 가라고 하겠다. 동산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라고 하니, 대중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거늘, 잠시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대중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니, 내가 스스로 대답하겠다.” 하고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갔다.통합뷰어직절直截하게 법을 들어 보이는 것이 대개 이상과 같았다.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호남湖南의 화엄사華嚴寺와 송광사松廣寺 등이 모두 스님의 발길이 머물던 곳들이다. 이후로 사방에서 선원禪院을 다투어 설치하였고, 발심發心한 납자들도 보고 느껴서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니, 시순時順335) 사이에 부처님의 광명을 맑게 씻고 사람들의 안목을 밝게 틔운 것이 이처럼 성대한 적이 없었다.통합뷰어임인년(1902) 가을, 스님은 범어사 금강암에 주석하고 있었다. 그 고을 동쪽에 있는 마하사에 나한개분불사羅漢改粉佛事336)가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로 초청하였다. 스님이 밤이 이슥해서야 절의 동구에 이르렀는데 칠흑처럼 캄캄해 길을 갈 수 없었다. 마하사 주지 스님이 잠깐 앉아서 조는데, 한 노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큰스님이 오셨으니 속히 나가 영접하라.” 하였다. 주지 스님이 꿈을 깨고 횃불을 들고 동구로 내려가니 과연 스님이 와 있었다. 비로소 나한이 현몽했음을 알고 대중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대중이 모두 기이한 일이라 놀랐고, 종전에 스님을 훼방하고 믿지 않던 이들이 모두 스님에게 와서 참회하였다.통합뷰어계묘년(1903) 가을,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다가 도중에 한 절구를 읊었다.통합뷰어識淺名高世危亂           식견은 얕고 이름은 높고 세상은 위태하니不知何處可藏身           모르겠구나, 어느 곳에 몸을 숨길 수 있을지.漁村酒肆豈無處           어촌과 주막에 어찌 그런 곳 없으랴만但恐匿名名益新           이름 감출수록 더욱 이름이 날까 두렵구나.통합뷰어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니,337) 스님의 뜻이 자신을 숨겨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통합뷰어이듬해 갑진년(1904) 봄에, 스님은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군安邊郡 석왕사에 이르렀다. 마침 석왕사에 오백나한 개분불사가 있어 제방의 대덕스님들이 법회에 와서 함께 증명법사가 되었다. 스님이 단상에 올라 독특한 변재로 설법하니 법회에 모인 대중이 합장하고 희유한 일이라 찬탄하였다. 법회를 회향한 뒤 스님은 종적을 감추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통합뷰어그리고 10년 뒤 수월水月 스님이 예산군 정혜선원定慧禪院으로 편지를 보내오기를, “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을 입고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를 오가면서 마을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들기도 하다가 임자년(1912) 봄,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 서재에서 입적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공滿空, 혜월慧月 두 사형이 곧바로 그곳으로 가서 널을 모셔다 난덕산蘭德山에서 다비하고 임종 때 쓴 게송을 가지고 돌아왔으니, 바로 스님이 입적한 이듬해 계축년(1913) 7월 25일이었다.통합뷰어그 동네 부로父老들에게 들으니,스님이 하루는 울타리 아래 앉아서 학동들이 호미로 풀을 매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누워 일어나지 못하면서 ‘내가 몹시 피곤하다’ 하기에 사람들이 부축하여 방 안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는 음식을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신음하지도 않고 다리를 뻗고 줄곧 누웠다가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이르러 문득 일어나 붓을 잡고서,통합뷰어心月孤圓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光呑萬像              그 빛이 만상을 삼키도다.光境俱亡              빛과 경계가 다 없어지면復是何物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338)통합뷰어라는 게송을 쓰고 말미에 일원상 ‘○’을 그리고는 붓을 놓고 우협右脇으로 누워 그대로 천화遷化하였으니, 때는 임자년 4월 25일이었다. 우리들이 예를 갖추어 어느 산에 장사지냈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오호라, 슬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실로 만겁토록 만나기 어려운데 우리들은 비록 잠시 친견했으나 오래 모시고 배우지 못했으며, 입적하시는 날에는 옛 도인들이 입적할 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곁에서 모시고 유지遺旨를 받아 후사를 결정하지 못했으니, 여한이 끝이 있겠는가!통합뷰어스님은 정사년에 태어나 임자년에 입적하였으며 9세에 출가하였으니, 향년은 56세이고, 법랍은 48세이다. 수법제자受法弟子 네 사람이 있다. 침운 현주枕雲玄住는 영남 표충사表忠寺에서 법을 펴다가 범어사에서 임종할 때 설법하고 게송을 쓰고 천화하였다. 혜월 혜명慧月慧明과 만공 월면滿空月面 두 선백禪伯은 어릴 때부터 스님을 모셔서 스님의 종지宗旨를 깊이 얻어 각각 한 지방의 스승이 되어서 후학을 제접하여 교화를 크게 펴고 있다. 불민한 나도 일찍이 스님을 찾아뵙고 선지禪旨를 들었는데, 단지 선사先師께서 나를 위해 설파해 주시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하므로 감히 그 법은을 저버리지 못한다.339) 이상이 네 사람이다.통합뷰어대저 행장이란 사실을 기록하고 허위로 쓰지 않는 법이다. 스님의 오도와 법을 편 인연은 진실로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스님의 풍모와 생활 모습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통합뷰어신장은 크고 고인古人의 풍모를 갖추었으며, 뜻과 기운은 과감하고 음성은 큰 종소리 같았으며, 무애변재를 갖추었으며, 세상의 일체 비방과 칭찬에 동요하지 않음이 산과 같아서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어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래서 술과 고기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었으며, 여색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 아무런 걸림 없이 유희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했다. 이는 이통현李通玄340)을 증득하여 자유로이 초탈한 삶을 산 것이 아니겠는가.통합뷰어아니면 때를 만나지 못하여 하열한 사람의 자리에 자신을 숨긴 채 자신을 낮추고 도를 스스로 즐긴 것이 아니겠는가.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큰 뜻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 크게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통합뷰어스님의 시에서,통합뷰어酒或放光色復然           술도 혹 방광하고 여색도 그러하니貪嗔煩惱送驢年           탐진치 번뇌 속에서 나귀의 해를 보내노라.佛與衆生吾不識           부처와 중생을 나는 알지 못하노니平生宜作醉狂僧           평생토록 술 취한 중이나 되어야겠다.통합뷰어라 하였으니, 스님의 일생 삶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이다.통합뷰어그러나 안거할 때는, 음식은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 먹었고, 종일토록 문을 닫고 앉아서 말없이 침묵하며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큰 도회지에 나가 교화를 펴기를 권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내게 서원이 있으니, 발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우뚝하고 꿋꿋한 풍모가 이와 같았다.통합뷰어천장암에 살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더운 여름에도 한 벌 누더기를 갈아입지 않아 모기와 파리가 온몸을 에워쌌고, 이와 서캐가 옷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물어뜯어 피부가 다 헐었는데도 고요히 움직이지 않은 채 산악처럼 앉아 있었다. 하루는 뱀이 몸에 올라가 어깨와 등을 꿈틀꿈틀 기어갔다. 곁에 있던 사람이 보고 깜짝 놀라 말해 주었으나 태연히 개의치 않으니, 조금 뒤 뱀이 스스로 물러갔다. 마음이 도와 합일한 경지가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통합뷰어한번 앉아서 여러 해를 찰나처럼 보내더니, 하루는 절구 한 수를 읊었다.통합뷰어世與靑山何者是           속세와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春城無處不開花           봄이 오매 어느 곳이건 꽃이 피는 것을.傍人若問惺牛事           누가 나의 경지를 묻는다면石女心中劫外歌           돌계집 마음속 겁외가라 하리라.통합뷰어그리고는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꺾어서 문 밖에 집어 던지고 훌쩍 산을 나와서 곳곳마다 다니면서 교화를 펴되, 형식이나 규율의 굴레를 벗어났다.통합뷰어때로는 저잣거리를 유유자적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어울리고 때로는 산속의 솔 그늘 아래 누워 한가로이 풍월을 읊음에 그 초일超逸한 경지를 사람들은 헤아려 알 수 없었으며, 때로 설법할 때는 지극히 온화하고 지극히 자상하여 부사의不思議한 묘지妙旨를 설명하였으니, 선도 철저하고 악도 철저하여 수단修斷으로써 수단할 수 없는 경지341)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스님은 문장과 필법도 모두 뛰어났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위대한 인물이었다.통합뷰어아! 출가한 사람들이 모두 스님과 같이 용맹하게 나아가고 큰 걸음을 걸어서 일대사를 해결하여 법등을 이어 밝힌다면, 신라 구산선문의 융성한 교화와 고려 십육 국사의 법통이 어찌 그 옛날에만 있던 일이리오. 교화를 높이고 법통을 이을 뿐만이 아니라 일체중생의 근본지根本智 광명종자光明種子를 이 오탁五濁 세계 중에서 길이 단절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터이니, 어찌 “깊은 마음으로 진찰塵刹의 중생들을 받드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님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하네.”342)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향을 사르고 깊이 축원하는 까닭이다.통합뷰어그러나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이 스님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스님의 행리를 배워서는 안 되니, 사람들이 믿되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을 의지한다는 것은 참되고 바른 묘법을 의지하는 것이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율의律儀와 불률의不律儀343)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본받는 것이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득실과 시비를 보지 않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필경에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남의 득실과 시비 따위야 말할 게 있겠는가.통합뷰어그러므로 『원각경』에서는,말세의 중생으로서 발심 수행하는 이는 응당 일체 바른 지견을 갖춘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형상에 머무르지 않아 비록 진로塵勞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그 마음은 항상 청정하고, 잘못한 모습을 보이지만 범행梵行을 찬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불률의에 들어가지 않게 한다. 이런 사람을 찾아 만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 그 선지식이 행주좌와 사위의四威儀에 늘 청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며 갖가지 잘못된 행실을 나타내어 보일지라도 중생들이 그 선지식에 대해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없어야 하고 나쁜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통합뷰어하였으며, 『금강경』에서는,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한다.통합뷰어하였으며, 보조 국사는,무릇 참학하는 사람은 처음 출발할 때 먼저 정인正因344)을 심어야 하니, 오계·십선·사성제·십이인연·육도 등의 법은 모두 정인이 아님을 믿고,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인 줄 믿어서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으면 3아승지겁이 공空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믿는 것이 바로 정인이다.통합뷰어하였다. 따라서 계율·사성제·십이인연·육도 등의 법도 외려 정인이 아닌데, 하물며 불률의야 말할 나위 있으리오. 그러므로 단지 바른 지견을 갖춘 사람을 찾아서 자기의 청정한 도안道眼을 결택해야지, 망령되게 삿된 믿음을 구하여 자신의 대사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통합뷰어또 고덕이 이르기를,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345)·수증修證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통달하게 할 뿐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말들은 정안正眼이 열림을 우선하고, 행리를 논함을 뒤로 한 게 아니겠는가.통합뷰어그래서 내가 “스님의 법화를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스님의 행리를 배워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이니, 이는 단지 법을 간택하는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무애한 행리만 본받는 자들을 꾸짖는 것이며, 또 유위有爲의 상견相見에 갇혀서 마음의 근원을 통철하지 못하는 자를 경책하는 것이다. 만약 법을 간택하는 바른 안목을 갖추고 마음의 근원을 통철했다면 행리가 자연히 진리에 맞아서 행주좌와 사위의에 항상 청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게 될 터이니, 어찌 겉모습에 현혹되어 미워하고 좋아하며, 나다 남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리오.통합뷰어경오년(1930) 겨울에 만공滿空 사형이 금강산 유점사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오대산으로 서찰을 보내어 나에게 선사의 행장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본래 문장을 익히지 못했으나 선사의 행장은 감히 짓지 않고 말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 사적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보이노니, 한편으로는 말법 세상에서 진정한 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하여 법을 편 부사의不思議한 공덕을 찬탄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사문이 망령되게 집착하여 밖으로 치달려서 헛되이 세월을 보냄으로써 부처님의 교화를 손상하는 잘못을 경계한다. 그리고 선사의 시와 기문 약간 편을 도반 선객들에게 부쳐 보내 초록하고 인쇄하여 세상에 유포되게 하노라.통합뷰어불기佛紀 2958년 신미년 3월 15일에 문인門人 한암 중원漢巖重遠은 삼가 찬술하다.
先師鏡虛和尙行狀金剛經云。若當来世後五百歲。其有衆生。得聞是經。信心淸淨。即生實相。當知是人成就第一希有功德。大慧和尙云。若不間於强項中打發得幾人。佛法豈到今日。盖發勇猛志徹法根源者。末法不無。故佛祖垂如是言。又罕有其人。慧命難保。故有如是言。孰能於此。具丈夫之志。而徹悟自性。成就其第一功德。而以大智慧光明義。廣大流通於後五百歲後也哉。繫我先師鏡虛和尙是也。和尙諱惺牛。初名東旭。鏡虛其號。俗姓宋。驪山人。考諱斗玉。妣密陽朴氏。以哲宗八年丁巳四月二十四日。生于全州之子東里。分娩後三日不啼。及浴身。始發兒聲。人皆稱神異焉。早喪所怙。九歲随慈母上京。投廣州淸溪寺。依桂虛師。祝發受戒。而有兄在公州麻谷寺得度。皆其慈母歸心三寶。念佛誠勤。故捨二子爲出家也。年尙幼。而志若巨人。雖遇困苦。無疲厭心。負薪汲水。化飯供師。年至十四。不遑學文。適有一儒者来同過夏。而以渠之僑居消遣。招坐其傍。試授以千字文。随學輒誦。又敎以通史等書。日誦五六紙。嘆曰。此兒眞非常才也。古所謂千里之驪。不遇伯樂。困於塩車也。他日必成大器。救度一切人去矣。居無何。桂虛師還俗。惜其才学而未就。馳書薦送於鷄龍山東鶴寺萬化和尙。和尙即當世講匠也。見其氣宇英拔。喜而提誘。不幾月。善属文。討教意。日課經䟽。一覽便誦。終日打睡。而翌日論問時。其消釋文義。若析『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3a01-a23)
薪秉燭。講師責其多睡。而欲試其才。特㝎課於圓覚經中䟽抄並五六紙乃至十餘紙。亦如前睡。而誦亦如之。衆皆嘆其未曾有也。自此才名高著。遍叅嶠湖講院。学日進而聞益博。至於儒典莊老。莫不精通。天性踈闊。外無苟餙。盛炎看經。衆皆着衣正坐。不勝苦汗。獨破脫自若。不事形儀。一愚講師見之。謂門人曰。真大乗法器也。汝軰不及。二十三歲。以衆望開講於東鶴寺。論教義。波爛洋洋。四方学者多歸之。一日思其前日桂虛師眷愛之義。而欲一訪問於其廬。遂告衆發行。至中路。忽風雨暴至。急步入一家簷頭。則迫逐不受。移徃他家而亦然。一洞數十家。皆逐之甚急。而高聲呵責曰。方今此處。癘疫大熾。染者立死。汝何人入於死地。和尙忽聞其言。毛骨竦然。心神恍惚。恰似箇大限當頭。命在呼吸間。一切世間。都是夢外靑山。仍自念言。此生寧爲痴呆漢。不爲文字所拘繫。叅尋祖道。超出三界。發願已。推念其平日所讀公案。以義学習性。皆生知解。無叅究分。唯靈雲禪師所示驢事未去馬事到来話。解之不得如撞着銀山鉄壁。即看是甚道理。還山後。遂散衆曰。君等随緣好去。我之志願。不在此。閉門端坐。專心究看。夜欲將睡。引錐刺股。或磨刀當頣。如是過三箇月。所看話頭。純一無雜。有一沙彌近侍。俗姓李。其父坐禪多年。自有開悟處。人皆號爲李處士。沙彌之師傅者。適徃其家。與處士談話次。處士曰。爲僧者。畢竟爲牛。其師曰。爲僧而未明心地。但受信施。則必爲牛而償其施恩。處士呵曰。所謂沙門而答話如是不諦當乎曰。我不識禪旨。如何答之即是。處士曰。何不道爲牛則爲無『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3b01-b24)
穿鼻孔處。其師默然而歸。謂沙彌曰。汝之嚴父有如是說話。而我都不知其什麽意旨。沙彌曰。今籌室和尙。做禪甚緊。廢寢忘餐。當知是理。願師傅徃問之。其師欣然而去。禮畢而坐。傳李處士之言。到牛無鼻孔處。和尙眼目定動。撞發古佛未生前消息。豁爾現前。大地平沈。物我俱忘。直到古人大休歇之地。百千法門無量妙義。當下氷消瓦觧。時則高宗十六年己卯冬十一月望間也。心外無法。滿目雪月。高岑流水長松下。永夜淸霄何所爲。眞可謂這箇道理。非汝境界。同道方知。遂高卧方丈。不關人之出入。萬化講師入見。亦卧而不起。講師曰。何故長卧不起。對曰。無事之人。本来如是。講師無言而退。翌年庚辰春。來住於燕岩山天蔵庵。兄太虛禪師奉慈母在此故也。有頌與歌。發揮其悟證處。嶷嶷然崖岸千尋。蕩蕩然名言俱絶。實不讓於古祖師家風矣。其頌曰。忽聞人於無鼻孔。頓覺三千是我家。六月燕岩山下路。野人無事太平歌。其歌有四顧無人。衣鉢誰傳。衣鉢誰傳。四顧無人之四句。冠於首。結於尾。此深嘆其師友淵源已絶。無印證相受處也。嘗示衆曰。夫祖宗門下。心法傳授。有本有㨿。不可錯亂。昔黃蘗聞百丈擧馬祖喝而悟道。嗣百丈。興化於大覺棒下。悟臨濟喫棒底消息。嗣臨濟於滅後。我東國。碧溪入中國。得法於緫統而來。遠嗣龜谷。震默以應化聖。嗣法於西山滅后。其師資相承。嚴密如此者。蓋在於以心印心心心即相印也。嗚呼。時降聖遠。其道已廢。然間有本色衲子興起。以殺活箭。射得一介半介聖人。故隱隱地扶持他正宗来。如暗得燈。似絶復生。余雖道未充而性不檢。一生所向。期『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4a01-a24)
在於此一着子明白。而今老矣。日後我弟子。當以我嗣法於龍岩長老。以整其道統淵源。而以萬化講師爲我之受業師。可也。今遵遺教。而泝法源流。則和尙嗣龍岩慧彦。彦嗣錦虛法沾。沾嗣栗峰靑果。果嗣靑峰巨岸。岸嗣虎岩軆淨。而淸虛傳之鞭羊。鞭羊傳之楓潭。楓潭傳之月潭。月潭傳之喚惺。和尙於淸虛。爲十一世孫。而於喚惺。爲七世孫也。久住湖西二十餘年。瑞山之開心。浮石。洪州之天藏。皆捿息鍊道處也。己亥秋。移錫于嶺南伽倻山海印寺。時高宗光武三年也。有勅旨印經。又建修禪社。居心學者。而衆皆推和尙爲宗主。陞座舉揚。直示本分。用白拈手。振殺活機。可謂金剛寶釰。獅子全威。聞者皆見亡執謝。洒然若換骨洗膓矣。結制上堂。拈柱杖一下云。三世諸佛歷代祖師天下善知識老和尙。總在這裏。又一卓劃来云。三世諸佛歷代祖師。又一卓劃去。三世諸佛歷代祖師天下善知識老和尙。總随去也。天下善知識老和尙。總随去也。大衆還會麽否。衆無對。擲柱杖下座。僧問。古云。動容揚古路。不墮悄然機。如何是古路。答。古路有二。一坦路。一險路。如何是險路。伽倻山下千岐路。車馬時時任徃來。如何是坦路。千尋絶璧無人到。惟有猢猻倒上來樹。解夏上堂。擧洞山示衆云。秋初夏末。兄弟東去西去。直須向萬里無寸草處去。余則不然。秋初夏末。兄弟東去西去。路上雜草。一一踏着始得。與洞山語。是同別。衆無對。良久云。衆已無對。余自對去。便下座歸方丈。其直截提示。類皆如此。而鷲山之通度。金山之梵魚。湖南之華嚴松廣。皆和尙遊歷處也。自后禪院四方爭設。發心衲子。亦觀感而雲興。時順間。洗佛『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4b01-b25)
光明。開人眼目。未有如此之盛也。壬寅秋。和尙住梵魚寺金剛庵。邑之東摩訶寺。有羅漢改粉佛事。而淸和尙以作證。夜暮抵寺洞口。路黑難進。寺之主僧。忽坐睡。一老僧告曰。大和尙來也。急出迎之。主僧夢覺。執炬下洞口。果和尙來矣。始知羅漢之現夢。告于衆。衆皆驚異。前有毁謗不信者。皆來懴悔焉。癸卯秋。自梵魚寺徃海印。途中有口號一絶。識淺名高世危亂。不知何處可藏身。漁村酒肆豈無處。但恐匿名名益新。盖詩言志。可知其志在韜晦惟求人不識也。翌年甲辰春。入五臺。歷金剛。到安邊郡釋王寺。適有五百羅漢改粉佛事。而諸方碩德。皆來法會。共作叅證。和尙臨壇。唱獨能之辯。一衆合掌。呈希有之嘆。回向後潛跡。不知所徃矣。十年後。自水月和尙。書信來付於禮山郡定慧禪院。即和尙長髮服儒来徃於甲山江界等地。或村齋訓蒙。或市街啣盃。壬子春。在甲山熊耳坊道下洞書齋入寂云。慧月滿空兩師兄。直入其地。奉柩就蘭德山闍維。得臨終時書偈而還。即和尙入滅後翌年癸丑七月二十五日也。聞諸其洞中父老。和尙一日坐籬下。看学童鋤草。忽卧而不起曰。予甚困也。衆人扶入房內。不食不言。又不呻吟。伸脚而卧。至翌日藜明。忽起坐。拈筆書偈曰。心月孤圓。光呑萬像。光境俱亡。復是何物。尾作一圓相○。因投筆。右脇而卧。奄然遷化。時壬子四月二十五日也。我等備禮。葬於某山云。嗚呼哀哉。大善知識出世。實萬劫難遇。而吾儕雖暫得親見。未能久侍叅学。歸寂之日。又未得『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5a01-a24)
叅決後事。如古道人入滅之時。餘恨可旣。和尙生於丁巳。寂於壬子。九歲出家。壽五十有六。臘四十有八。有受法第子四人。曰枕雲玄住。行道於嶺南表忠寺。而臨終在梵魚寺。說法書偈而化。曰慧月慧明曰滿空月面兩禪伯。自妙年叅侍。深得和尙宗旨。各爲一方師。提接方来。其化大行。而余雖不敏。亦曾參聽玄旨。而只重先師不爲我說破。故不敢辜負其法恩。是爲四也。夫行狀者。記其實。不以虛也。和尙之悟道揚化因緣。誠如上言。若論其行履。則身長貌古。志氣果强。聲若洪鍾。具無碍辯。對八風。不動如山。行則行。止則止。不爲人之打之遶。故飮啖自由。聲色不拘。曠然遊戱。招人疑謗。此乃以廣大心。証不二門。超放自如。如李通玄宗道者之類乎。抑亦不遇而慷慨。藏身於下劣之地。以卑自牧而以道自樂歟。非鴻鵠。難知鴻鵠之志。非大悟。安能不拘於小節哉。和尙詩有酒或放光色復然。貪嗔煩惱送驢年。佛與衆生吾不識。平生宜作醉狂僧之句。寫出其一生行履也。然其安處也。食纔接氣。掩關終日。沈然寡言。不喜見人。人或勸揚化於大都會。則曰。吾有誓願。足不踏京城之地。其卓越勁挺。盖如此。住天蔵庵時。一領鶉衣。寒暑不改。蚊蚋繞身。虱兒滿衣。晝宵侵囓。肌膚瘡爛。寂然不動。坐如山嶽。一日。有蛇上身。蟠蜿於肩背。傍人驚告。叅然無心。小焉蛇自引去。非與道凝精。孰如是哉。一坐多年。如經刹那。一朝有吟。一絶曰。世與靑山何者是。春城無處不開花。傍人若問惺牛事。石女聲半刼亦歌。遂拗折柱杖。擲於門外。翩『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5b01-b24)
然出山。随方宣化。脫略窠印。不存軌則。或懶遊城序。混同塵俗。或閑卧松亭。嘯傲風月。其超適之趣。人莫能測。有時垂示。則極柔和。甚精細。演不可思議之妙旨。可謂善到底惡到底。不可以修断而修断也。文章筆法。皆過於人。真希世偉人也。噫。出家之人。皆如和尙勇進濶步。而辦明大事。燈燈相續。則九山隆化。十六継旣。豈獨專在於前昔也哉。非特隆化継統而已。抑亦使一切衆生根本智光明種子。永不断絶於五濁界中矣。豈非深心奉塵刹名爲報佛恩哉。吾所以焚香深祝者也。然後之学者。學和尙之法化則可。学和尙之行履則不可。人信而不解也。又依法者。依其真正妙法也。不依人者。不依其律儀與不律儀也。又依者。師而效之也。不依者。不見其得失是非也。学道之人。畢竟法亦能捨。况於人之得失是非乎。故圓覚經云。末世衆生發心修行者。當求一切正知見人。心不住相。雖現塵勞。心恒淸淨。示有諸過。讃嘆梵行。不令衆生入不律儀。求如是人。即得成就阿耨萻提。彼善知識。四威儀中。常現淸淨。乃至示現種種過惠。衆生於彼。心無憍慢。不起惡念。金剛經云。若以色見我。以音聲求我。是人行邪道。不能見如来。又普照國師云。夫叅学者。發足。先植正因。信五戒十善四諦十二因緣六度等法。皆非正因。信自心是佛。一念無生。三祇刼空。如是信得及。乃是正因。然則戒諦緣度等法。尙非正因。况於不律儀乎。故但求正知見人。決擇『경허집』 [鏡虛和尙集卷之一(漢巖 筆寫本)](ABC, H0283 v11, p.656a01-a24)
自已淸淨道眼。不可以妄求邪信。誤着大事也。又古德云。只貴眼正。不貴行履。又云。我之法門。不論禪定觧脫持犯修證。惟達佛之知見。此非先開正眼而後論行履耶。故曰。学和尙之法化則可。学和尙之行履則不可。此但責其未具擇法眼而先效其行履無碍者也。又策其局執於有爲相見。不能洞徹心源者也。若具擇法正眼而洞徹心源。則行履自然稱真。四威儀內。常現淸淨。安可爲外相之所幻惑。起愛憎人我之見也哉。庚午冬。滿空師兄在金剛山楡岾寺禪院祖堂。寄書於五抬山中。囑余述先師行狀。余本不閒於文辭。然其於先師行狀。不敢以已之。故記其事。以示後人。一以讃末法中真善知識出世弘法之難思功德。一以警吾軰之妄執外走而虛度時日以傷損佛化之過失焉。又以禪師之詩咏與記文若干篇。付同行諸禪和。抄錄印刷。行于世。佛紀二千九百五十八年辛未三月十五日。門人漢岩重遠謹撰。
『금강경』에 “앞으로 올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實相을 낼 것이니, 응당 알라. 이 사람은 가장 으뜸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대혜大慧 스님은 “만약 강항强項한 사람 중에서 간혹 몇 사람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불법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으리오.”327)라고 하였다.통합뷰어대개 용맹스런 뜻을 일으켜 법의 근원을 사무치는 이가 말법 세상에도 없지 않았으므로 불조가 이런 말씀을 후세에 남겼던 것이고, 또 그만한 사람이 드물어 불조의 혜명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통합뷰어뉘라서 여기에서 장부의 뜻을 갖추고 자기 본성을 사무쳐 깨달아 가장 으뜸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 광명의 뜻을 후오백세의 세상에 널리 펼칠 수 있겠는가? 바로 우리 경허 스님이 그러한 분이다.통합뷰어스님은, 휘는 성우惺牛이고 초명은 동욱東旭이며, 경허는 그 호이다. 속성은 송씨宋氏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부친은, 휘는 두옥斗玉이고 모친은 밀양密陽 박씨朴氏이다. 철종 7년328) 정사년(1857) 4월 24일에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분만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시킬 때에 비로소 울음을 터트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이한 일이라 하였다.통합뷰어스님은 일찍 부친을 잃고 아홉 살 때 모친을 따라 상경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의 청계사에 들어가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수계하였다. 스님의 형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니, 모두 모친이 삼보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염불하였던 까닭에 두 아들을 출가시킨 것이었다.통합뷰어스님은 나이가 아직 어릴 때에도 뜻은 마치 거인巨人과 같아서 아무리 곤고困苦한 일을 만나도 지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 늘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 밥을 지어 스승을 섬기느라 열네 살이 될 때까지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다.통합뷰어그런데 마침 한 선비가 청계사에 와서 함께 여름 한철을 보내게 되었다. 그 선비가 절에 와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스님을 불러 곁에 앉혀 놓고 『천자문』을 가르쳐 보았더니 배우는 족족 곧바로 외웠다. 또 『통감』·『사략』 등의 책들을 가르쳤더니 하루에 대여섯 장씩 외웠다. 그 선비가 탄식하기를, “이 아이는 참으로 비상한 재주이다. 옛날에 이른바 ‘천리마가 백락伯樂을 못 만나 소금수레를 끈다’329)라는 격이로구나. 훗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일체중생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통합뷰어그리고 얼마 뒤 계허 스님은 환속하면서 스님의 재주와 학문을 성취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겨 추천하는 편지를 써서 스님을 계룡산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에게 보냈다. 만화 스님은 당대에 뛰어난 강백이었다통합뷰어만화 스님은 영특한 스님을 보고 기뻐하면서 가르쳤는데 몇 달이 안 되어 글을 잘 짓고 경전의 뜻을 새길 줄 알아 일과로 배우는 경소經疏를 한번 보면 곧바로 외웠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잠자고도 이튿날 논강할 때 글 뜻을 풀이하는 것이 마치 도끼로 장작을 쪼개고강사가 잠이 많음을 꾸짖고는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특별히 『원각경』 중에서 소초疏抄 5, 6장 내지 10여 장을 일과로 정해 주었는데, 스님은 여전히 잠을 자고도 종전처럼 외니, 대중이 모두 미증유한 일이라고 탄복하였다.통합뷰어이로부터 재명이 높이 드러났고 영남과 호남의 강원들에 두루 가서 공부하니, 학문은 날로 높아지고 견문은 날로 넓어져 유가와 노장의 글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통합뷰어스님은 천성이 소탈하여 겉치레를 꾸미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 경을 볼때 대중들은 모두 가사 장삼을 걸치고 단정히 앉아 땀을 흘리며 고생을 참고 있는데, 스님은 홀로 옷을 벗고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강사인 일우一愚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문인들에게 “참으로 대승 법기大乘法器이니, 너희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23세에 스님은 대중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강석을 열어 교의敎義를 강론함에 드넓은 물결처럼 거침없으니, 사방의 학인들이 몰려왔다.통합뷰어하루는 지난날 계허 스님이 자신을 보살피고 아껴 주었던 정의情義가 생각나서 한번 찾아가 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대중에게 말한 후 출발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통합뷰어스님은 급히 발걸음을 옮겨 어느 집 처마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내쫓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집으로 옮겨 가도 마찬가지였다. 온 동네 수십 집 모두 몹시 다급하게 내쫓으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역질이 크게 창궐하여 걸리는 자는 곧바로 죽는다.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라고 하였다.통합뷰어스님은 문득 이 말을 듣고는 모골이 송연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흡사 죽음이 눈앞에 임박하고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어 일체 세간의 일들이 모두 덧없는 꿈 저편의 청산인 것만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해 말하기를, “이 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 받지 않고 조사의 도를 찾아서 삼계를 벗어나리라.”라고 하였다.통합뷰어발원을 마치고 평소에 읽은 공안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교학을 공부한 습성으로 모두 알음알이가 생겨 참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영운 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마사도래화驢事未去馬事到來話’331)만은 마치 은산철벽을 마주한 것처럼 도무지 알 수 없기에 곧바로 “이 무슨 도리인고?”라고 참구하였다.통합뷰어계룡산에 돌아온 뒤 대중을 해산하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 따라 잘 가시게. 나의 지원志願은 여기(講學)에 있지 않네.” 하고는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전심으로 화두를 참구하였다. 밤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하고, 시퍼렇게 간 칼을 턱밑에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석 달을 지나자 참구하는 화두가 순일무잡해졌다.통합뷰어한 사미승이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는데 속성은 이씨李氏였다. 그의 부친이 다년간 좌선하여 스스로 개오한 곳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이 처사라 불렀다. 그 사미승의 스승이 마침 이 처사의 집에 가서 이 처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통합뷰어이 처사가 “중이 된 자는 필경 소가 되지요.”라고 하니, 사미승의 스승이 “중이 되어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하고 단지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 그 시은을 갚게 마련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처사가 그 말을 듣고 꾸짖기를, “소위 사문으로서 이처럼 맞지 않은 대답을 한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사미승의 스승이 “나는 선지禪旨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겠소?” 하니, 이 처사가 “어찌하여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고 말하지 않소?”라고 하였다.통합뷰어그 사미승의 스승이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서 사미승에게 “너의 부친이 이와 같은 말을 했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라고 하니, 사미승이 “지금 조실 스님이 매우 열심히 참선하느라 폐침망찬廢寢忘餐하고 있으니, 이 이치를 아실 것입니다. 스님께서 가셔서 물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통합뷰어그 스승이 흔연히 가서 경허 스님과 수인사를 마치고 이 처사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는데,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스님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문득 깨달아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소식이 눈앞에 활짝 드러났다. 이에 대지大地가 가라앉고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 곧바로 고인古人이 크게 쉰 경지에 이르러 백천 가지 법문과 한량없는 묘의妙義가 당장에 빙소와해氷消瓦解 하듯이 풀렸다. 때는 고종 16년 기묘년(1879) 겨울 11월 보름께였다.통합뷰어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눈에 가득한 흰 눈과 달빛이라 높은 산 흐르는 시냇가 소나무 아래에서 긴긴 밤 맑은 하늘 아래 무슨 할 일이 있으리오. 이는 참으로 “이 도리는 너의 경계가 아니니, 도가 같은 이라야 비로소 안다.”라고 한 경계이다. 스님은 방장실에 한가로이 누워서 남들이 출입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화 강백이 들어왔는데도 역시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만화가 “무슨 까닭에 늘 누워서 일어나지 않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라고 하였다. 만화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통합뷰어이듬해 경진년 봄, 연암산燕巖山 천장암天藏庵에 와서 머물렀으니, 속가의 형인 태허 선사太虛禪師가 모친을 모시고 이 암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지은 ≺오도송≻과 ≺오도가≻가 있는데 증오證悟한 경지를 드러내 밝힌 것이 우뚝 높아 천 길 벼랑 같고, 드넓고 커서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니, 실로 옛 조사의 가풍에 손색이 없다.통합뷰어그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통합뷰어忽聞人語無鼻孔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자頓覺三千是我家           문득 삼천세계가 나임을 깨달았노라.六月燕巖山下路           유월이라 연암산 아랫길에野人無事太平歌           농부들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통합뷰어그 ≺오도가≻에는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구나.(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라는 네 구절을 첫머리에 얹고 끝마무리로 썼으니, 이는 사우師友의 연원이 이미 끊어져 자신의 오도悟道를 인증하고 법을 전해 줄 사람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통합뷰어스님은 일찍이 대중에게 말씀하셨다.통합뷰어“조종祖宗 문하에서 심법을 전수해 온 것은 근본이 있고 근거가 있으니, 착란해서는 안 된다. 옛날 황벽黃蘗은, 마조馬祖가 할喝한 기연을 백장百丈이 얘기하는 것을 듣고 도를 깨달아 백장의 법을 이었고, 흥화興化는, 대각大覺의 방棒 아래에서 임제臨濟가 방을 맞은 소식을 깨달아 임제가 입멸한 뒤에 임제의 법을 이었으며, 우리 동국에서는, 벽계碧溪가 중국에 들어가 총통總統에게 법을 얻고 와서 멀리 구곡龜谷의 법을 이었고, 진묵震黙이, 응화應化한 성인으로서 서산西山이 입멸한 뒤에 서산의 법을 이었다. 그 스승과 제자가 서로 법을 이음이 이처럼 엄밀한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인증하고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증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통합뷰어오호라! 후대로 내려와 성인의 시대와 멀어짐에 그러한 도는 이미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혹 본색납자本色衲子가 나와서 살활殺活의 화살로 한 개나 반 개의 성인을 쏘아서 얻는다. 그러므로 은연중에 저 바른 종지를 지키는 것이 마치 어둠 속에 등불을 얻고 숨이 끊어졌다 다시 소생하는 것과 같다.통합뷰어나는 비록 도는 부족하고 성품은 행검行檢이 없지만 일생 동안 지향한 바는 기필코 이 일착자一着子훗날 나의 제자는 응당 나를 용암 장로龍巖長老에게서 법을 잇도록 하여 도통의 연원을 바로잡고 만화 강백으로서 내가 수업한 스승을 삼도록 하라.”통합뷰어이제 그 유교遺敎에 따라 법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보면, 스님은 용암 혜언龍巖慧彦(1783~?)을 이었고, 용암 혜언은 금허 법첨錦虛法沾을 이었고, 금허 법첨은 율봉 청고栗峯靑杲를 이었고, 율봉 청고는 청봉 거안靑峯巨岸을 이었고, 청봉 거안은 호암 체정虎巖體淨(1687~1748)을 이었으며, 청허淸虛(1520~1604)는 편양鞭羊(1581~1644)에게 전하고, 편양은 풍담楓潭(1592~1665)에게 전하고, 풍담은 월담月潭(1632~1704)에게 전하고, 월담은 환성煥惺(1664~1729)에게 전하였으니, 스님은 청허에게 12세손이 되고, 환성에게 7세손이 된다.통합뷰어스님은 호서에 22년 동안 오래 머물렀으니, 서산瑞山의 개심사와 부석사, 홍주洪州의 천장암天藏庵이 모두 스님이 살면서 도를 닦던 곳들이다.기해년 가을, 영남의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 주석하였으니, 때는 고종 광무光武 3년(1899)이었다. 칙지勅旨가 내려 장경을 인쇄하는 한편 수선사修禪社를 세워서 선객들을 거주하게 했는데, 대중이 모두 스님을 추대하여 종주宗主로 삼았다.통합뷰어스님은 법좌에 올라 본분 도리를 곧바로 보이며 백념白拈333)의 수단을 써서 살활의 기용機用을 떨치니, 금강왕의 보검이요 사자의 위세라 할 만하였다. 설법을 듣는 이들이 모두 사견이 없어지고 집착이 사라져 씻은 듯 깨끗하기가 마치 뼈를 바꾸고 내장을 씻어내는 것 같았다.통합뷰어결제 때 법상에 올라 주장자를 들어 한 번 내려치고 이르시기를,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 노스님들이 모두 여기에 있도다.” 하고, 또 주장자를 들어서 허공을 한 번 긋고는 이르기를, “삼세제불과 역대조사와 천하의 선지식 노스님들이 이를 따라갔도다. 대중은 도리어 알겠는가?” 하고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주장자를 던지고 법상에서 내려왔다.통합뷰어한 승려가 묻기를, “옛날에 이르기를 ‘모든 거동을 옛길에서 드날려 초연悄然한 기틀에 떨어지지 않는다’334) 하였으니, 어떠한 것이 옛길입니까?”라고 하니, 스님이 답하기를, “옛길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평탄한 길이고, 하나는 험준한 길이다. 어떤 것이 험준한 길인가? 가야산 아래 천 갈래 길에 거마車馬가 때때로 마음대로 오고 간다. 어떤 것이 평탄한 길인가? 천 길 깎아지른 벼랑에 오르는 사람 없는데 오직 잔나비만이 거꾸로 나무에 오른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하안거 해제 때 법좌에 올라 동산洞山이 시중示衆하기를, “초가을 늦여름에 형제들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니, 모쪼록 만 리에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가라.”라고 한 것을 들어서 말하기를,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초가을 늦여름에 형제들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니, 길 위에 난 잡초들을 일일이 밟고 가라고 하겠다. 동산의 말과 같은가, 다른가?”라고 하니, 대중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거늘, 잠시 묵묵히 있다가 말하기를, “대중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니, 내가 스스로 대답하겠다.” 하고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와 방장실로 돌아갔다.통합뷰어직절直截하게 법을 들어 보이는 것이 대개 이상과 같았다.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호남湖南의 화엄사華嚴寺와 송광사松廣寺 등이 모두 스님의 발길이 머물던 곳들이다. 이후로 사방에서 선원禪院을 다투어 설치하였고, 발심發心한 납자들도 보고 느껴서 구름처럼 모여들었으니, 시순時順335) 사이에 부처님의 광명을 맑게 씻고 사람들의 안목을 밝게 틔운 것이 이처럼 성대한 적이 없었다.통합뷰어임인년(1902) 가을, 스님은 범어사 금강암에 주석하고 있었다. 그 고을 동쪽에 있는 마하사에 나한개분불사羅漢改粉佛事336)가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로 초청하였다. 스님이 밤이 이슥해서야 절의 동구에 이르렀는데 칠흑처럼 캄캄해 길을 갈 수 없었다. 마하사 주지 스님이 잠깐 앉아서 조는데, 한 노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큰스님이 오셨으니 속히 나가 영접하라.” 하였다. 주지 스님이 꿈을 깨고 횃불을 들고 동구로 내려가니 과연 스님이 와 있었다. 비로소 나한이 현몽했음을 알고 대중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대중이 모두 기이한 일이라 놀랐고, 종전에 스님을 훼방하고 믿지 않던 이들이 모두 스님에게 와서 참회하였다.통합뷰어계묘년(1903) 가을,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다가 도중에 한 절구를 읊었다.통합뷰어識淺名高世危亂           식견은 얕고 이름은 높고 세상은 위태하니不知何處可藏身           모르겠구나, 어느 곳에 몸을 숨길 수 있을지.漁村酒肆豈無處           어촌과 주막에 어찌 그런 곳 없으랴만但恐匿名名益新           이름 감출수록 더욱 이름이 날까 두렵구나.통합뷰어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니,337) 스님의 뜻이 자신을 숨겨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통합뷰어이듬해 갑진년(1904) 봄에, 스님은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군安邊郡 석왕사에 이르렀다. 마침 석왕사에 오백나한 개분불사가 있어 제방의 대덕스님들이 법회에 와서 함께 증명법사가 되었다. 스님이 단상에 올라 독특한 변재로 설법하니 법회에 모인 대중이 합장하고 희유한 일이라 찬탄하였다. 법회를 회향한 뒤 스님은 종적을 감추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통합뷰어그리고 10년 뒤 수월水月 스님이 예산군 정혜선원定慧禪院으로 편지를 보내오기를, “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선비의 옷을 입고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를 오가면서 마을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리키기도 하고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들기도 하다가 임자년(1912) 봄,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 서재에서 입적했다.”라고 하였다. 이에 만공滿空, 혜월慧月 두 사형이 곧바로 그곳으로 가서 널을 모셔다 난덕산蘭德山에서 다비하고 임종 때 쓴 게송을 가지고 돌아왔으니, 바로 스님이 입적한 이듬해 계축년(1913) 7월 25일이었다.통합뷰어그 동네 부로父老들에게 들으니,스님이 하루는 울타리 아래 앉아서 학동들이 호미로 풀을 매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누워 일어나지 못하면서 ‘내가 몹시 피곤하다’ 하기에 사람들이 부축하여 방 안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는 음식을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신음하지도 않고 다리를 뻗고 줄곧 누웠다가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이르러 문득 일어나 붓을 잡고서,통합뷰어心月孤圓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光呑萬像              그 빛이 만상을 삼키도다.光境俱亡              빛과 경계가 다 없어지면復是何物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338)통합뷰어라는 게송을 쓰고 말미에 일원상 ‘○’을 그리고는 붓을 놓고 우협右脇으로 누워 그대로 천화遷化하였으니, 때는 임자년 4월 25일이었다. 우리들이 예를 갖추어 어느 산에 장사지냈다.라고 하였다.통합뷰어오호라, 슬프다! 대선지식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실로 만겁토록 만나기 어려운데 우리들은 비록 잠시 친견했으나 오래 모시고 배우지 못했으며, 입적하시는 날에는 옛 도인들이 입적할 때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곁에서 모시고 유지遺旨를 받아 후사를 결정하지 못했으니, 여한이 끝이 있겠는가!통합뷰어스님은 정사년에 태어나 임자년에 입적하였으며 9세에 출가하였으니, 향년은 56세이고, 법랍은 48세이다. 수법제자受法弟子 네 사람이 있다. 침운 현주枕雲玄住는 영남 표충사表忠寺에서 법을 펴다가 범어사에서 임종할 때 설법하고 게송을 쓰고 천화하였다. 혜월 혜명慧月慧明과 만공 월면滿空月面 두 선백禪伯은 어릴 때부터 스님을 모셔서 스님의 종지宗旨를 깊이 얻어 각각 한 지방의 스승이 되어서 후학을 제접하여 교화를 크게 펴고 있다. 불민한 나도 일찍이 스님을 찾아뵙고 선지禪旨를 들었는데, 단지 선사先師께서 나를 위해 설파해 주시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하므로 감히 그 법은을 저버리지 못한다.339) 이상이 네 사람이다.통합뷰어대저 행장이란 사실을 기록하고 허위로 쓰지 않는 법이다. 스님의 오도와 법을 편 인연은 진실로 이상에서 말한 바와 같거니와 스님의 풍모와 생활 모습을 말하면 다음과 같다.통합뷰어신장은 크고 고인古人의 풍모를 갖추었으며, 뜻과 기운은 과감하고 음성은 큰 종소리 같았으며, 무애변재를 갖추었으며, 세상의 일체 비방과 칭찬에 동요하지 않음이 산과 같아서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어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았다. 그래서 술과 고기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었으며, 여색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 아무런 걸림 없이 유희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했다. 이는 이통현李通玄340)을 증득하여 자유로이 초탈한 삶을 산 것이 아니겠는가.통합뷰어아니면 때를 만나지 못하여 하열한 사람의 자리에 자신을 숨긴 채 자신을 낮추고 도를 스스로 즐긴 것이 아니겠는가. 홍곡鴻鵠이 아니면 홍곡의 큰 뜻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 크게 깨달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통합뷰어스님의 시에서,통합뷰어酒或放光色復然           술도 혹 방광하고 여색도 그러하니貪嗔煩惱送驢年           탐진치 번뇌 속에서 나귀의 해를 보내노라.佛與衆生吾不識           부처와 중생을 나는 알지 못하노니平生宜作醉狂僧           평생토록 술 취한 중이나 되어야겠다.통합뷰어라 하였으니, 스님의 일생 삶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이다.통합뷰어그러나 안거할 때는, 음식은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 먹었고, 종일토록 문을 닫고 앉아서 말없이 침묵하며 사람을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큰 도회지에 나가 교화를 펴기를 권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내게 서원이 있으니, 발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우뚝하고 꿋꿋한 풍모가 이와 같았다.통합뷰어천장암에 살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더운 여름에도 한 벌 누더기를 갈아입지 않아 모기와 파리가 온몸을 에워쌌고, 이와 서캐가 옷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물어뜯어 피부가 다 헐었는데도 고요히 움직이지 않은 채 산악처럼 앉아 있었다. 하루는 뱀이 몸에 올라가 어깨와 등을 꿈틀꿈틀 기어갔다. 곁에 있던 사람이 보고 깜짝 놀라 말해 주었으나 태연히 개의치 않으니, 조금 뒤 뱀이 스스로 물러갔다. 마음이 도와 합일한 경지가 아니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통합뷰어한번 앉아서 여러 해를 찰나처럼 보내더니, 하루는 절구 한 수를 읊었다.통합뷰어世與靑山何者是           속세와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春城無處不開花           봄이 오매 어느 곳이건 꽃이 피는 것을.傍人若問惺牛事           누가 나의 경지를 묻는다면石女心中劫外歌           돌계집 마음속 겁외가라 하리라.통합뷰어그리고는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꺾어서 문 밖에 집어 던지고 훌쩍 산을 나와서 곳곳마다 다니면서 교화를 펴되, 형식이나 규율의 굴레를 벗어났다.통합뷰어때로는 저잣거리를 유유자적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어울리고 때로는 산속의 솔 그늘 아래 누워 한가로이 풍월을 읊음에 그 초일超逸한 경지를 사람들은 헤아려 알 수 없었으며, 때로 설법할 때는 지극히 온화하고 지극히 자상하여 부사의不思議한 묘지妙旨를 설명하였으니, 선도 철저하고 악도 철저하여 수단修斷으로써 수단할 수 없는 경지341)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스님은 문장과 필법도 모두 뛰어났으니, 참으로 세상에 드문 위대한 인물이었다.통합뷰어아! 출가한 사람들이 모두 스님과 같이 용맹하게 나아가고 큰 걸음을 걸어서 일대사를 해결하여 법등을 이어 밝힌다면, 신라 구산선문의 융성한 교화와 고려 십육 국사의 법통이 어찌 그 옛날에만 있던 일이리오. 교화를 높이고 법통을 이을 뿐만이 아니라 일체중생의 근본지根本智 광명종자光明種子를 이 오탁五濁 세계 중에서 길이 단절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터이니, 어찌 “깊은 마음으로 진찰塵刹의 중생들을 받드는 것을 이름하여 부처님 은혜를 갚는 것이라 하네.”342)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향을 사르고 깊이 축원하는 까닭이다.통합뷰어그러나 후세의 배우는 사람들이 스님의 법화法化를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스님의 행리를 배워서는 안 되니, 사람들이 믿되 이해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을 의지한다는 것은 참되고 바른 묘법을 의지하는 것이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율의律儀와 불률의不律儀343)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본받는 것이고,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득실과 시비를 보지 않는 것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필경에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남의 득실과 시비 따위야 말할 게 있겠는가.통합뷰어그러므로 『원각경』에서는,말세의 중생으로서 발심 수행하는 이는 응당 일체 바른 지견을 갖춘 사람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형상에 머무르지 않아 비록 진로塵勞의 모습을 나타내지만 그 마음은 항상 청정하고, 잘못한 모습을 보이지만 범행梵行을 찬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불률의에 들어가지 않게 한다. 이런 사람을 찾아 만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으리라. 그 선지식이 행주좌와 사위의四威儀에 늘 청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며 갖가지 잘못된 행실을 나타내어 보일지라도 중생들이 그 선지식에 대해 마음에 교만한 생각이 없어야 하고 나쁜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통합뷰어하였으며, 『금강경』에서는,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여래를 보지 못한다.통합뷰어하였으며, 보조 국사는,무릇 참학하는 사람은 처음 출발할 때 먼저 정인正因344)을 심어야 하니, 오계·십선·사성제·십이인연·육도 등의 법은 모두 정인이 아님을 믿고,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인 줄 믿어서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으면 3아승지겁이 공空하게 된다. 이와 같이 믿는 것이 바로 정인이다.통합뷰어하였다. 따라서 계율·사성제·십이인연·육도 등의 법도 외려 정인이 아닌데, 하물며 불률의야 말할 나위 있으리오. 그러므로 단지 바른 지견을 갖춘 사람을 찾아서 자기의 청정한 도안道眼을 결택해야지, 망령되게 삿된 믿음을 구하여 자신의 대사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통합뷰어또 고덕이 이르기를, “다만 안목이 바름만 귀하게 여기고 행리行履는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345)·수증修證을 논하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지견을 통달하게 할 뿐이다.” 하였으니, 이러한 말들은 정안正眼이 열림을 우선하고, 행리를 논함을 뒤로 한 게 아니겠는가.통합뷰어그래서 내가 “스님의 법화를 배우는 것은 괜찮지만 스님의 행리를 배워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이니, 이는 단지 법을 간택하는 안목을 갖추지 못하고, 먼저 그 무애한 행리만 본받는 자들을 꾸짖는 것이며, 또 유위有爲의 상견相見에 갇혀서 마음의 근원을 통철하지 못하는 자를 경책하는 것이다. 만약 법을 간택하는 바른 안목을 갖추고 마음의 근원을 통철했다면 행리가 자연히 진리에 맞아서 행주좌와 사위의에 항상 청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게 될 터이니, 어찌 겉모습에 현혹되어 미워하고 좋아하며, 나다 남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리오.통합뷰어경오년(1930) 겨울에 만공滿空 사형이 금강산 유점사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오대산으로 서찰을 보내어 나에게 선사의 행장을 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본래 문장을 익히지 못했으나 선사의 행장은 감히 짓지 않고 말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 사적을 기록하여 후인들에게 보이노니, 한편으로는 말법 세상에서 진정한 선지식이 세상에 출현하여 법을 편 부사의不思議한 공덕을 찬탄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사문이 망령되게 집착하여 밖으로 치달려서 헛되이 세월을 보냄으로써 부처님의 교화를 손상하는 잘못을 경계한다. 그리고 선사의 시와 기문 약간 편을 도반 선객들에게 부쳐 보내 초록하고 인쇄하여 세상에 유포되게 하노라.통합뷰어불기佛紀 2958년 신미년 3월 15일에 문인門人 한암 중원漢巖重遠은 삼가 찬술하다.

余不敢辭。再三讀之。其所著非徒工於詩文。而大率禪文法語玄談妙句。或高唫於酒肆屠市之間而不入世間。或縱筆於空山雨雪之中而不出世間。縱橫淋漓。生熟自在。無文不禪。何句非法。莫論其軌則之如何。實一大奇文奇詩也。而後輩之欲公於世者。其志實不在乎傳其文字。而亦在乎傳其法語也.

나는 감히 사양할 수 없어 그 초고를 재삼 읽어 보았더니, 그 저술이 시문에 공교할 뿐 아니라 대체로 선문이요 법어이며, 현담이요 묘구였다. 술집이나 저잣거리에서 높이 시를 읊되 세간에 빠져들지 않으며, 한적한 산속 눈비 내리는 중에 붓을 휘둘러도 세간을 벗어나지 않아 종횡으로 펼쳐진 글에 생경하고 익숙함이 자유롭다. 무슨 글인들 선禪 아님이 없으니, 어느 글귀인들 법이 아니리오! 문장을 짓는 궤칙에 맞는지 여부는 막론하고 실로 일대 기이한 시문이다. 그러나 후진들이 이 시문을 세상에 공간公刊하고자 하는 것은, 그 뜻이 실로 그 문장을 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법어를 전하는 데 있다.

余亦切望此書之速行于世。其後其門徒與有志者以爲鏡虛之所述。不止於此。而尙遺於其晩年潜跡之地者不尠。期欲盡其完璧。故其付梓之議。一時寢之。自今春以來。後學金靈雲。尹燈岩等發奮力圖。專徃于甲山。江界及滿洲等地。窮査極搜。庶幾無漏。余更加修正。而其年代次序。莫之可

考。故隨蒐編纂耳.

나도 이 책이 속히 세상에 간행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그 후 그 문도와 뜻이 있는 이들이 “경허가 지은 글이 이 정도에 그치지 않고, 아직도 만년에 자취를 감추고 살던 지역에 남아 있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여 기어코 완벽하게 유문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 책을 간행하자던 논의가 일시 중지되었다. 올봄부터 후학 김영운金靈雲, 윤등암尹燈岩 등이 이 일을 위해 발분하고 나서서 갑산甲山, 강계江界 및 만주 등지로 직접 가서 샅샅이 조사하여 거의 빠짐없이 수습하였다. 내가 다시 원고를 수정하였으나 연대의 선후는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수집한 대로 편찬하였다.


余固知和尙元非文字之專攻家。則其詩與文。在於章句之規範與精工。或有一舍之逕庭者。而未足以爲全城之一瑕。朗空之片雲。然其禪旨妙韻。錚然有聲於尋常筆墨之間而大有功於後學者。又安可疑也.

스님이 원래 문장을 전공한 분이 아님을 나는 잘 안다. 따라서 스님의 시문은 문장을 짓는 법도와 정련精練된 수사에는 크게 맞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전역全域의 한 흠이나 맑은 허공의 조각구름이 될 정도는 못 된다. 그러나 그중에서 선지禪旨가 담긴 오묘한 시편들은 심상한 작품들 중에서 특히 뛰어나 후학들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 어찌 의심할 나위 있겠는가.

鏡虛和尙在世時。常擬一見。痛飮一大白。罵倒三世諸佛爲快。奈事與心違。卒卒未能。於焉和尙入寂數十年之後。接其手澤。浮世之慷慨。固若是也。

경허 스님이 세상에 계실 때 늘 한번 만나서 한번 술을 맘껏 마시고 삼세제불을 통쾌히 매도罵倒하고 싶었건만,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음을 어이하리오! 어느덧 스님이 입적하신 지 수십 년 뒤에 그 유고를 받아 보니, 덧없는 세상에 대한 강개한 심정이 진실로 이와 같도다.

世尊降誕後二千九百六十九年壬午九月二日。韓龍雲識。

세존 탄강誕降 후 2969년 임오년 9월 2일에 한용운韓龍雲은 삼가 쓰노라.


⟪경허집 鏡虛集⟫(ABC, H0283 v11, p.587c01-c11)웹페이지 편집 : 법진 (2024 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