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법명은 성우惺牛이고 경허는 호이다. 속명은 동욱東旭이고 여산송씨礪山宋氏이며, 부친은 송두옥宋斗玉이다. 모친 밀양박씨密陽朴氏는 신심이 깊은 불자로 평소 지성으로 염불하였다. 1849년 4월 24일에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분만한 뒤 울지 않다가 사흘이 지나 목욕시킬 때 비로소 울음을 터트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이神異한 일이라 하였다.
스님은 일찍 부친을 잃고 아홉 살 때 모친을 따라 상경하여 경기도 광주廣州 청계사에 들어가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삭발 수계하였다. 스님의 형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니 법명은 성원性圓, 법호는 태허太虛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마음이 넓고 커서 아무리 힘든 일을 만나도 지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 사미승이 되어서는 늘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 밥을 지어 스승을 시봉하느라 열네 살이 될 때까지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한 선비가 청계사에 와서 함께 여름 한 철을 지냈다. 그 선비가 절에 와 지내면서 스님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보았더니 배우는 족족 곧바로 외웠고, 이어서 『통감』·『사략』 등을 가르쳤더니 하루에 대여섯 장씩 외웠다. 그 선비가 탄식하기를, “이 아이는 참으로 재주가 비상하다. 옛날에 이른바 ‘천리마가 백락伯樂을 못 만나 소금수레를 끈다’라는 격이로구나. 훗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많은 중생을 구제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계허 스님은 환속하면서 추천하는 편지를 써서 스님을 계룡산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에게 보냈다. 만화 스님은 당대에 이름난 강백이었다
만화 스님은 영특한 스님을 보고 기뻐하면서 가르쳤는데 몇 달이 안 되어 글을 잘 짓고 경전의 뜻을 새길 줄 알아 일과로 배우는 경소經疏를 한번 보면 곧바로 외웠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잠자고도 이튿날 논강할 때 글 뜻을 풀이하는 것이 마치 도끼로 장작을 쪼개고 촛불을 잡고 비추는 듯 명쾌하고 분명하였다. 스님이 잠을 많이 자기에 강사가 꾸짖고 『원각경』 중에서 소초疏抄 5, 6장 내지 10여 장을 일과로 정해 주었다. 스님은 여전히 잠을 자고도 종전처럼 잘 외니, 대중이 모두 미증유한 일이라고 탄복하니, 이로부터 스님의 명성이 알려졌다. 스님은 영남과 호남의 강원들에 두루 가서 공부하여 유가와 노장의 글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달하였다.
스님은 천성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겉치레 격식을 꾸미지 않았다. 더운 여름철에 다른 스님들은 모두 가사 장삼을 걸치고 땀을 흘리며 단정히 앉아 경을 읽는데, 스님은 홀로 덥다고 가사 장삼을 벗어버렸다. 강사인 일우一愚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문인들에게 “참으로 대승大乘의 법기法器이니, 너희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
1871년 23세 때부터로 동학사에서 강석을 열어 박통博通한 학식으로 거침없이 교의敎義를 강론하니, 사방에서 학인들이 몰려왔다.
1879년 31세 때 하루는 환속한 은사 계허 스님이 생각나서 찾아가 보려고 가는 도중에 갑자기 거센 비바람을 만났다. 스님은 급히 발걸음을 옮겨 어느 집 처마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내쫓고 받아들이지 않았고, 다른 집으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온 동네 수십 집에서 모두 몹시 다급하게 내쫓으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역질이 크게 창궐하여 걸리는 자는 곧바로 죽는다.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라고 하였다. 당시 콜레라가 크게 번져 사람들이 죽어가던 상황이었다.
스님은 모골이 송연하여 흡사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고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는 듯하여 일체 세상일들이 덧없는 꿈과 같이 느껴졌다. 이에 참선을 하여 생사를 벗어나리라 발원하고 평소에 읽은 공안公案들을 생각해 보니, 교학을 공부한 습성 때문에 모두 알음알이가 생겨 참구할 여지가 없었는데, 오직 영운 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마사도래화驢事未去馬事到來話’만은 마치 은산철벽을 마주한 것처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곧바로 이 화두를 참구하였다.
스님은 계룡산에 돌아온 뒤 대중을 해산하고는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 화두를 참구하였다. 밤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하고, 시퍼렇게 간 칼을 턱밑에 세우기도 하면서 애써 정진하여 석 달을 지나자 화두가 순일해졌다.
한 사미승이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는데, 속성은 이씨李氏였다. 그의 부친이 다년간 좌선하여 스스로 개오開悟한 곳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이 처사라 불렀다. 그 사미승의 스승이 마침 이 처사의 집에 가서 이 처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처사가 “중이 된 자는 필경 소가 되지요.”라고 하니, 사미승의 스승이 “중이 되어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하고 단지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 그 시은을 갚게 마련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처사가 그 말을 듣고 꾸짖기를, “소위 승려로서 이처럼 맞지 않은 대답을 한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사미승의 스승이 “나는 선지禪旨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겠소?” 하니, 이 처사가 “어찌하여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고 말하지 않소?”라고 하였다.
그 사미승의 스승이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와서 사미승에게 “너의 부친이 이와 같은 말을 했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라고 하니, 사미승이 “지금 조실 스님이 밥 먹고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참선하고 있으니, 이 이치를 아실 것입니다. 스님께서 가셔서 물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그 스승이 가서 경허 스님과 수인사를 마치고 이 처사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는데,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스님의 눈이 번쩍 뜨이더니, 문득 깨달아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소식이 눈앞에 활짝 드러났다. 이에 대지大地가 가라앉고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 곧바로 고인古人이 크게 쉰 경지에 이르러 백천 가지 법문과 한량없는 묘의妙義가 당장에 빙소와해氷消瓦解하듯이 풀렸다. 때는 고종 16년 기묘년(1879) 겨울 11월 보름께였다.
스님은 무사한도인無事閑道人이 되어 방에 한가로이 누운 채 남이 출입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스승 만화 강백이 들어왔는데도 역시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만화 강백이 “무슨 까닭에 늘 누워서 일어나지 않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일 없는 사람은 본래 이러합니다.”라고 하였다. 만화 강백이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이듬해 경진년(1880) 봄, 연암산燕巖山 천장암天藏庵에 와서 머물렀으니, 속가의 형인 태허 太虛 스님이 모친을 모시고 이 암자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천장암에서 보임하고 이듬해 1881년에 <오도송>과 <오도가>를 읊었다.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忽聞人語無鼻孔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자
頓覺三千是我家 문득 삼천세계가 나임을 깨달았노라.
六月燕巖山下路 유월이라 연암산 아랫길에
野人無事太平歌 농부들이 한가로이 태평가를 부르네.
그리고 <오도가>에서는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으니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의발을 누가 전해 줄거나. 사방을 돌아봐도 사람이 없구나.(四顧無人, 衣鉢誰傳? 衣鉢誰傳, 四顧無人.)”라는 네 구절로 시작하고 끝을 맺었으니, 이는 사우師友의 연원이 이미 끊어져 자신의 오도悟道를 인증하고 법을 전해 줄 사람이 없음을 깊이 탄식한 것이다.
스님은 대중에게 “훗날 나의 제자는 용암 장로龍巖長老에게서 나의 법맥을 잇고 만화 강백으로서 내가 수업한 스승을 삼도록 하라.”라고 부촉하였다. 이 유교遺敎에 따라 법맥을 따져 보면, 스님은 용암 혜언龍巖慧彦(1783~?)을 이었고, 용암 혜언은 금허 법첨錦虛法沾을 이었고, 금허 법첨은 율봉 청고栗峯靑杲를 이었고, 율봉 청고는 청봉 거안靑峯巨岸을 이었고, 청봉 거안은 호암 체정虎巖體淨(1687~1748)을 이었으며, 청허淸虛(1520~1604)는 편양鞭羊(1581~1644)에게 전하고, 편양은 풍담楓潭(1592~1665)에게 전하고, 풍담은 월담月潭(1632~1704)에게 전하고, 월담은 환성煥惺(1664~1729)에게 전하였으니, 스님은 청허로부터 12세손이 되고, 환성으로부터 7세손이 된다.
이후로 스님은 충청도 서산瑞山의 개심사와 부석사, 홍주洪州의 천장암 등지에서 22년 동안 주석하면서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空 등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1884년 10월 동학사東鶴寺의 진암眞岩 화상이 14세 도암道岩 행자를 보냈다. 후일에 도암 행자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一歸何處) 화두를 공부한 경계를 말하자 스님이 “화중생련火中生蓮이로다.” 하고, 이어서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하게 하였다. 도암 행자가 스님을 가장 오래 시봉하였고, 훗날 만공 월면滿空月面이 된다.
1898년 50세 때 도비산 부석사에 주석하다가 오성월(吳惺月1865-1943)스님의 초청을 받고 제자 만공滿空(28세), 침운枕雲과 함께 동래 범어사 계명암雞鳴庵에 갔다.
1899년 51세 때 가을에는 영남의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 조실로 주석하였다. 이때 고종황제의 칙지勅旨가 내려와 대장경을 인쇄하는 한편 수선사修禪社를 세워서 선객들을 거주하게 했는데, 대중이 모두 스님을 추대하여 종주宗主로 모셨다.
1900년 52세 때에는 1월 하순에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점안불사點眼佛事의 증명이 되었다. 이후로 1, 2년 동안 지리산 화엄사, 쌍계사, 천은사, 백장암, 실상사, 영원사, 벽송사 및 동리산 태안사, 덕유산 송계암 등 사찰들에 선원을 창설하여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하였다.
54세 때인 1902년 가을, 스님은 범어사 금강암에 주석하고 있었다. 그 고을 동쪽에 있는 마하사에 나한개분불사羅漢改粉佛事가 있어 스님을 증명법사로 초청하였다. 스님이 밤이 이슥해서야 절의 동구에 이르렀는데 칠흑처럼 캄캄해 길을 갈 수 없었다. 마하사 주지 스님이 잠깐 앉아서 조는데, 한 노스님이 나타나 이르기를, “큰스님이 오셨으니 속히 나가 영접하라.” 하였다. 주지 스님이 꿈을 깨고 횃불을 들고 동구로 내려가니 과연 스님이 와 있었다. 비로소 나한이 현몽했음을 알고 대중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대중이 모두 기이한 일이라 놀랐고, 종전에 스님을 훼방하고 믿지 않던 이들이 모두 스님에게 와서 참회하였다. 이 해 범어사에 주석하면서 『선문촬요禪門撮要』를 편찬하였다.
//이 해에 2월에 혜월 혜명慧月慧明에게 “염득분명 등등상속(拈得分明 燈燈相續)”이란 말과 함께 전법게를 주었다.(천장암으로 알고 있었는데, 천장암이 아닐 수 있음.)--‘염득분명 등등상속’ 대목을 넣을지는 상의하기 바람.-
55세 때인 1903년 가을, 범어사에서 해인사로 가다가 도중에 한 절구를 읊었다.
識淺名高世危亂 식견은 얕고 이름은 높고 세상은 위태하니
不知何處可藏身 모르겠구나, 어느 곳에 몸을 숨길 수 있을지.
漁村酒肆豈無處 어촌과 주막에 어찌 그런 곳 없으랴만
但恐匿名名益新 이름 감출수록 더욱 이름이 날까 두렵구나.
56세 때인 1904년 해인사에서 인경불사印經佛事를 마치고 천장암으로 와서 2월 11일에 제자 만공滿空에게 전법게傳法偈를 주고 떠났다.
그리고 스님은 오대산에 들어가서 『화엄경』 법회에서 법문한 다음 금강산을 거쳐서 안변군安邊郡 석왕사에 이르렀다. 마침 석왕사에 오백나한 개분불사가 있어 제방의 대덕 스님들이 법회에 와서 함께 증명법사가 되었다. 스님이 단상에 올라 독특한 변재로 설법하니 법회에 모인 대중이 합장하고 희유한 일이라 찬탄하였다. 법회를 마친 뒤 스님은 종적을 감추었다.
이후로 박난주朴蘭洲로 이름을 바꾸고 함경도 강계군江界郡 종남면終南面 한전동閑田洞에 있는 담여淡如 김탁金鐸의 집에 머물며 서당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는 한편 삼수三水, 갑산甲山, 장진長津 일대를 떠돌았다.
스님이 입적한 뒤 수월水月 스님이 예산군 정혜선원定慧禪院으로 편지를 보내오기를, “스님이 머리를 기르고 선비 옷을 입고 갑산甲山·강계江界 등지를 오가면서 마을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치는 한편 저잣거리에서 술잔을 들기도 하다가 임자년(1912) 봄, 갑산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 서당에서 입적했다.”라고 하였다.
동네 부로父老들의 말에 의하면, 스님이 하루는 울타리 아래 앉아서 학동들이 호미로 풀을 매는 것을 보다가 갑자기 누워 일어나지 못하면서 ‘내가 몹시 피곤하다’ 하기에 사람들이 부축하여 방 안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서는 음식을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신음하지도 않고 다리를 뻗고 줄곧 누웠다가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이르러 문득 일어나 붓을 잡고서,
心月孤圓 마음 달이 외로이 둥그니
光呑萬像 그 빛이 만상을 삼키도다.
光境俱亡 빛과 경계가 다 없어지면
復是何物 다시 이 무슨 물건인가.
라는 게송을 쓰고 말미에 일원상 ‘○’을 그리고는 붓을 놓고 우협右脇으로 누워 그대로 천화遷化하였다고 한다. 때는 임자년 4월 25일이었다.
그 이듬해 1913년에 제자 만공滿空과 혜월慧月이 가서 7월 25일에 난덕산蘭德山에서 다비하고 임종 때 쓴 게송을 가지고 돌아왔다.
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로는 혜월 혜명慧月慧明, 만공 월면滿空月面, 침운 현주枕雲玄住 및 「선사경허화상행장先師鏡虛和尙行狀」을 찬술한 한암 중원漢巖重遠이 있다.
스님은 신장이 크고 용모는 옛날의 위인들처럼 걸출하였으며, 성품은 과감하고 음성은 종소리처럼 우렁찼으며, 변재辯才가 뛰어나 설법을 매우 잘하였다. 세상의 비방과 칭찬에는 일절 동요하지 않고 남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아 자신이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었다. 그래서 술과 고기도 마음대로 마시고 먹었으며, 여색에도 구애되지 않은 채 아무런 걸림 없이 유희하여 사람들의 비방을 초래하였으니, 이는 이통현李通玄·종도宗道와 같은 옛사람들처럼 광대한 마음으로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증득하여 자유로이 초탈한 삶을 산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의 시에,
酒或放光色復然 술도 혹 방광하고 여색도 그러하니
貪嗔煩惱送驢年 탐진치 번뇌 속에서 나귀의 해를 보내노라.
佛與衆生吾不識 부처와 중생을 나는 알지 못하노니
平生宜作醉狂僧 평생토록 술 취한 중이나 되어야겠다.
라 하였으니, 스님의 일생 삶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수행에 철저하여 안거할 때는, 음식은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 먹었고, 종일토록 문을 닫고 앉아서 말없이 침묵하며 좀처럼 사람을 만나지 않으며 정진하였다. 어떤 사람이 큰 도회지에 나가 교화를 펴기를 권하니, 스님은 말하기를, “내게 서원誓願이 있으니, 발이 경성 땅을 밟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스님은 평소 곧은 조행操行을 짐작할 만하다.
천장암에 살 때에는 추운 겨울에도 더운 여름에도 한 벌 누더기를 갈아입지 않아 모기와 파리가 온몸을 에워쌌고, 이와 서캐가 옷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물어뜯어 피부가 다 헐었는데도 고요히 움직이지 않은 채 산악처럼 앉아 있었다. 하루는 뱀이 몸에 올라가 어깨와 등을 꿈틀꿈틀 기어갔다. 곁에 있던 사람이 보고 깜짝 놀라 말해 주었으나 태연히 개의치 않으니, 조금 뒤 뱀이 스스로 물러갔다.
천장암에서 어느 날 절구 한 수를 읊었다.
世與靑山何者是 속세와 청산 어느 것이 옳은가?
春城無處不開花 봄이 오매 어느 곳이건 꽃이 피는 것을.
傍人若問惺牛事 누가 나의 경지를 묻는다면
石女心中劫外歌 돌계집 마음속 겁외가라 하리라.
그리고는 주장자를 꺾어서 문밖에 집어 던지고 훌쩍 산을 내려와서 때로는 저잣거리를 유유자적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섞여 어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산속의 솔 그늘 아래 누워 한가로이 풍월을 읊기도 하니, 그 초연한 경지를 사람들은 헤아려 알 수 없었다. 때로 설법할 때는 지극히 온화하고 지극히 자상하여 부사의不思議한 묘지妙旨를 설명하였으니, 선善도 철저하고 악惡도 철저하여 수단修斷으로써 수단할 수 없는 경지라고 할 만하다. 게다가 스님은 문장과 필법도 모두 뛰어났으니, 참으로 말세에 드문 위대한 선지식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