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월면선사 실기(實記)
전북 김제군 태인읍에서 출생하신 송신통 선생은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신통 묘술이 있어 운수 예측을 잘하여 만인의 길흉을 명백히 판단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호를 ‘신통선생’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47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음을 탄식하고 미륵석불을 전주 황방산에 모셔놓고 백일기도를 지극 발원하고 도인 아들 낳기를 기원하며 빌었다. 회향할 때 꿈에 하늘에서 한 소화상이 녹라의(綠羅衣) 붉은 가사를 수하고 흰 구름을 타고 내려와 신통선생의 품에 안기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천상에 있는 화산도사의 제자로서 선생에게 부자(父子)될 인연이 있으므로 내려왔으니 아무쪼록 품어주시기를 바랍
니다.”
선생이 꿈에서 깨어서는 득남할 줄 알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후 돌아와서 그달부터 태기가 있어 신미년 3월 초7일에 열달이 차서 순산득남하였으니, 기골이 웅장하고 범상한 아이가 아님을 알고 무한히 기뻐하였으며, 이름을 ‘도암’이라 하였다. 그리고 아이의 관상을 보고 말씀하기를, 이 아이가 장래에 반드시 고승이 될 것이며, 부인도 저 아이를 따라서 불문에 종사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아이가 두 살 되던 해에 홀연히 말씀하시기를, “아무 날 아무 시에는 내가 세상을 떠나리라.” 하셨다. 그날이 돌아오니 시간을 기다리시며 고요히 돌아가셨다 합니다. 세월이 흐르는 물 같아 어느덧 도암이 9세가 되었습니다.
태인읍 상일리 선앙산하 죽림가에서 종형(從兄)을 의지하여 몇 년을 지내오다가 13세가 되던 해에 문복쟁이(점쟁이)가 말하기를, “금년에 신수(身數)가 나쁘니, 돌아오는 설에는 절에 가서 부처님을 모시고 과세(過歲: 설을 쇰)하라.”고 부탁을 하고 가더랍니다. 그래서 금산사 절에 설 쇠러 갔더랍니다. 절이라고는 처음으로 금산사를 구경하는 가운데 부처님도 처음 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나이는 어리나 내심으로 생각하기를, “이 세상에도 이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무한히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모친을 모시고 설을 쇠고, 정월 초이튿날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후로는 날마다 그 절과 그 부처님이 눈앞에 나타나서 세상살이가 다 하기도 싫고 항상 나도 절에 가서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있던 중에
가까운 절도 많이 있었으나 종형이 엄격하여 감히 절에 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몰래 간다 하더라도 가까운 절에는 못 살 것 같아, 하루는 일찍 새벽에 일어나서 모친과 종형 몰래 도망가서 거기서 70~80리 되는 전주 봉서사로 갔습니다. 거기서 며칠 있어보니, 마음에 스승 삼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그곳을 떠나 근처 송광사라는 절에 갔습니다. 거기서도 역시 선생 삼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또 그곳을 떠나서 은진 쌍계사로 가서 진암화상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상께 두어 달 시봉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진암화상이 계룡산 동학사로 이사를 가시게 되어, 도암은 아직 중은 되지 않고, 진암화상을 따라서 동학사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갑신년(1884) 겨울인데 동학사에서 강원
이 크게 융성하였던 시기이고, 강주화상은 만우화상이고 제방에 유명한 강백이 많이 운집하여 계셨으니, 학명화상과 태평화상과 속리산 월파화상과 경산정토, 경운화상과 각처에서 온 70여명 학인들이 계셨다 합니다.
그런데 갑신년(1884) 겨울 산림 결제를 하게 되었는데, 석양에 어간문 밖에서 “객 문안 드립니다.” 하는 소리에, 입승스님이 들어오시게 하니, 어간문을 열고 객스님 한 분이 들어오시는데, 신장은 8척이고, 존엄한 태도는 두 번 바라보기 어려웠습니다. 결제예식을 마치고 밤에 결제법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본방 조실 화상이 상당 법문을 하시되, “그릇도 반듯하여야 하며, 비뚤어지면 못 쓴다.” 하시며, “나무도 쪽 곧아야지 꼬부라지면 못
쓴다.” 하시며, “사람도 선량하고 덕이 있어야지, 악하고 불측(不測: 예측못함)하면 못 쓴다.”고 하시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다음에 경허화상이 상당 법문하시되, “아까 본방 조실화상께서 하신 법문이 적절하시나 비뚤어진 그릇은 비뚤어진대로 반듯하고, 굽어진 나무는 굽어진 대로 곧으며, 사람은 악하고 불측한대로 선량하도다.” 하시고 법좌에서 내려오셨습니다. 도암동자가 스스로 아무것도 모르는 소견으로 우연히 뜻으로 경허스님 법문을 들으니 그 뜻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부터 경허스님을 스승으로 삼고 배우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길로 경허화상을 따라서 내포 천장사로 오니, 마침 수월화상이 그때 전씨 총각으로 와 있었습니다. 그후 을유년(1885) 3월에 수월화상과 함께 득도식을 하였다고 합니
다. 그래서 수월화상은 불명이 ‘음관(音觀)’이요, 도암은 불명이 ‘월면(月面)’이라 하였습니다. 두분 다 은사는 경허화상의 속가 형이신 태허화상이고, 수계사는 경허화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난 후에 월면대사가 나이 스물셋 되던 갑오년(1894)이 되었습니다. 그해 동지달에 하루는 17세 가량 된 초립 쓴 청년이 한 명 와서 같이 법당에서 쉬던 중에 그 청년이 말하기를, “대사께 할 말이 있습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있소?” 하고 물으니, “어떤 스님이 나에게 말하되,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 뜻을 알면 온 천하에 모를 것이 없다.’ 하였으니, 혹 대사가 그 뜻을 알면 나에게 좀 일러주시오.” 합니다. 그래서 월면대사가 생각해보니, 그 사람에게 일러주기는 고사하고 본인도 생전 처음 듣는 말이라 크
게 의심이 나서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재차 “왜 안 일러주시오?” 하기에 대사가 대답하기를, “당신께 일러주기는 고사하고, 처음 듣는 말이라게 의심이 나서 얼빠진 사람처럼 앉아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재차 “왜 안 일러주시오?” 하기에 대사가 대답하기를, “당신께 일러주기는 고사하고, 처음 듣는 말이라 가슴이 답답하오.” 하니, 그 청년은 아무 말없이 자고, 이튿날 떠났습니다.
그날부터 참선 이름도 모르고, 다만 그 청년이 말한 ‘만법귀일’ 뜻을 참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의심을 잠깐 놓을려고 해도 쉬어지지도 않고 성성불매(惺惺不昧)하여 살림하고 시봉하는 일이 점점 버거워졌습니다. 독살이에 원주일까지 많은 가운데, 기도며 불공이며 시주손님 접대에 이르기까지 도무지 공부를 전일하게 할 수가 없어서 태허화상 모르게 누더기 한 벌을 걸망에 넣어 걸머지고 도망쳐서 온양 봉국사에 가서 노전을 맡아보면서 일념으로
만법귀일을 참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을미년(1895) 7월 26일 새벽에 법당에서 쇳송을 하다가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대문에 이르러 ‘온 대지가 일정하게 금이다’는 소식을 깨달으니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비로자나전신 아님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을 만나도 범소유상(凡所有相)이 개시허망(皆是虛妄)이니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한 진실도(眞實道)에 정진하여 나와 함께 벗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듣는 대중스님들이 크게 놀라면서 모두 어제 저녁에 말짱하던 사람이 밤새 실성한 소리를 한다 하며 서로 돌아봅니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서로 지기(知己: 벗)가 되지 아니하므로 며칠 후에 떠나서 태화산 서양동 깊은 숲에 들어가 백로(白鷺)와 노닐며 등나무 우거진 두어칸 방에서 자기를 알아주며 도를 돕는 선객과 동거하면서 어떤 때에는 밭도 갈며 어떤 때에는 나무도 하며
혹은 도한(屠漢: 백정)을 불러, 이뭣꼬[是甚麽]? 하며, 혹은 일백 새소리와 돌샘 쟁쟁하는 물소리로 벗을 삼아서 5년간 보림하던 중에, 계사 경허화상이 왕림하시자 그간에 공부했던 자초지종을 고백하였습니다. 경허화상 말씀이, “불 가운데 연화(蓮花)로다.” 하시고선 며칠 머무신 뒤에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토굴을 버리고 화상을 따라 서산 부석사로 가서 날마다 설하시는 법문을 배우고 있다가 임인년 3월에 경허화상을 모시고 부석사를 떠나 동래 범어사에 갔습니다. 계명암에 선원을 신설하고 경허화상을 종주(宗主)로 모시고 30명 대중이 수선 안거를 마쳤습니다.
해제 후에 노모가 천장사에 계심으로 인해 어머니를 뵈올려고 화상께 인사하고 떠나오는 길에 양산 통도사 백운
암에 올라가서 장마를 만나 한 보름을 묵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전이 아침 예불 때에 금고(金鼓)를 치는데, 그 소리를 듣다가 홀연 스스로 깨쳤으니, 시방(十方)이 겁외간(劫外間)이라. 그 후 백운암을 떠나 며칠 후에 천장사로 오셨는데, 수년 후에 경허화상이 올라오셔서 모든 법을 점검하시고 인가하셨으니, 당호를 ‘만공(滿空)’이라 하시고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설하셨습니다.
雲月溪山處處同 구름과 달, 시내와 산이 도처에 같음이
叟山禪子大家風 수산叟山 선자의 큰 가풍일세
慇懃分付無文印 은밀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一段機權活眼中 일단의 기봉과 권도를 활안 중에 있게 하라
그 후 화상은 곧장 북으로 떠나가시고, 선사는 그때부터 종주로 세상에 나오셔서 모든 납자를 가르치시니 35세부터 출세하셨다고 합니다. 제1회는 천장사에서 마치시고, 제2회는 계룡산 대비암에서 마치시고, 제3회는 마곡사 매화당에서 하시고, 그 후
정혜사로 오셔서 계시는 중에 유점사에 가셔서 2~3회 하시고, 마하연에 가셔서 2~3회 하셨으니, 유점사에서는 납자가 53명이었고, 마하연에서는 60여명이었다 하며, 가신 곳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경오년(1930) 유점사에서 두회 산림을 하시고, 임신(1932) 계유(1933) 갑술년(1934)은 마하연에서 종주로 계셨으며, 그후로는 늘 정혜사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덕숭산 정혜사에서 병술(1946) 10월 21일에 고요히 열반에 드셨으니, 그때 세수 76세였습니다.
1)이 글은 선복스님(1886~1970) 상좌인 성오스님이 필사한 글로, 안성 법계사(주지: 도윤)에 있다가 수덕사 근역성보관으로 기증한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선복스님은 12세에 입궁(入宮)하였다가 경복궁에서 원만스님의 법화경 설법을 듣고서 출가하였으며, 만공스님의 법제자이다.
2)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이다.
3)임인년은 1902년이다. 『경허법어』(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찬, 1981년)에 따르면 경허화상과 범어사에 간 시기가 1898년으로 나와 있으니, 아마도 전사과정에 오류가 있는 듯하다.
「만공월면선사 실기」
이 글은 청운당 선복 스님(1886~1970)의 상좌인 성오 스님(1909~1985)이 필사한 글로, 총 12면이다. 원래 경기도 안성 법계사에 소장하고 있다가 2024년 봄에 수덕사근역성보관에 기증한 자료집 안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만공 선사의 출생, 출가 인연, 경허 선사와의 만남, 수월 스님과의 인연, 깨달음의 기연機緣, 스승의 인가와 전법게 등 선사의 일대기가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선복 스님은 8세에 입궁入宮하였다가 경복궁에서 원만 스님의 『법화경』 설법을 듣고서 발심하여 20세에 출가하였으며, 비구니로서는 만공 선사의 첫 법제자이다. 선사에게 비구니 제자가 있다는 소문이 난 이후로 법희 스님, 일엽 스님 등 여러 비구니 스님들이 선사의 회상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선복 스님은 만공 선사가 열반에 들 때까지 상좌 성오 스님과 함께 시봉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성오 스님은 특히 만공 선사가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하실 때, 함께 수행한 바가 있으며, 가장 오랫동안 선사 곁에서 시봉하였던 비구니로서 실제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이 글을 직접 작성하였다. 제목에도 ‘실기實記(실제 기록)’라고 붙였으며, 특히 수월 스님과 함께 불명을 받은 인연, 스승에게 전법게를 받고 그 후의 출세出世 활동 등의 내용은 기존의 『만공법어』에 실린 만공 선사 행장(진성원담 스님 찬술)에는 없고, 여기에만 있는 내용이므로 자료적 가치가 뛰어나다.
성오 스님 필사, 지본묵서, 총12면, 19.8×27.5. 수덕사근역성보관 소장.
⟪만공선사실기⟫
12면, 소장_ 수덕사 근역성보관 (안성법계사 기증, 2024)촬영_ 양현모, 일스튜디오 (2024, 07)탈초,번역, 입력_ 선암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