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鏡虛) 鏡虛의 姓은 宋氏, 初名은 東旭, 諱는 惺牛, 號는 鏡虛, 李朝 第24代 憲宗 15年(1849) 4月 24日 全羅北道 全州邑 于東里(現在 全北 益山郡 礪山面)에서 出生하였다. 일찍 父親을 잃고 9살 때 어머니를 따라 京畿道 廣州 清溪寺에 나아가 桂虛和尚에게서 중이 되었으며, 14살 때 儒者를 만나 天字文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재주가 뛰어났었다. 恩師인 桂虛가 退俗하므로 當時 敎界의 泰斗였던 東鶴寺 萬化講伯(圓悟이니 1694~1758)을 찾아가 內典을 鍊磨하는 餘暇에 老典과 儒籍을 涉獵하여 진실로 通達치 않은 바가 없었다. 스님은 本來부터 氣宇가 英拔하고, 天性이 浩蕩하여 事物에 조금도 苟飾 또는 疑滯함이 없었다. 23살 때 衆望을 얻어 東鶴寺에서 開講하니 談叢에 花發하고 義海에 浪起하여 學人들이 四方으로부터 雲集하였다. 31살 때 恩師桂虛가 還俗하기 以前에 자기를 보살펴준 恩惠를 잊지 못하여 그의 집을 찾으러 떠났다. 마침 中路에서 暴風雨를 만나 이를 避하려고 길가의 한 집에 찾아 들어 갔더니, 까닭 없이 逐客을 當하여 이웃집에 갔으나 亦是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이 一洞數十家가 모두 한결같이 拒絶하면서 至今 이곳에 콜레라(cholera)인 무서운 傳染病이 流行하여 染者는 即死하니 死地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鏡虛는 毛骨이 竦然하고 心神이 昏忙하여 生命이 呼吸의 사이에 있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一切世間이 모두 夢外青山이어늘 貪着할 것이 무엇이 있으리오? 하고 佛祖의 通關을 찾아 三界를 超越하리라 하고, 平日에 公案을 知解로 分別하다가 靈雲禪師(志勤)의 驢事未去에 馬事到來의 話頭를 了解치 못하던 疑心이 아직도 남았음을 알았다. 山으로 돌아와 學衆을 解散하고 나의 할 일이 이밖에 남아있다 하여 門戶를 嚴閉하고 송곳으로 다리를 찌르며 利刀로 턱을 괴이면서 正念端坐 하길 三個月 동안 하였다. 그리하여 提撕한 話頭가 純一無雜하고 寂靜了了하여 大悟即前의 무렵에 侍奉하던 沙彌의 스승이 찾아와 前日 그가 多年間 坐禪하여 所得處가 있다는 李處士(沙彌의 아버지)와의 問答하는 말 가운데 施主 것을 먹고 放逸하면 죽어 소가 되되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豁然히 古佛未生前의 消息을 깨달았으니 이때가 바로 高宗16年(1879) 10月 15日 결젯날이었다. 그 後 方丈室에 堅臥하여 사람의 出入도 關心치 않았다. 萬化講伯이 들어가도 또한 일어나지 않으므로 講伯이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누워 있느냐? 하니 無事한 사람은 本來 이러합니다 하였다. 翌年(1889) 봄에 燕岩(忠南 瑞山郡 高北面 集要里) 天藏庵에 慈母를 侍奉코자 來徃하였다. 그때 悟證을 읊은 글이 있으니 可히 古祖의 家風을 傳한다 할 것이다.
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吾家
六月燕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家
32살 때 洪州 天藏庵에서 龍岩의 法을 이어받았으니 곧 清虛의 11世孫이며 喚惺의 7世法孫이 된다. 瑞山의 開心寺, 善山의 桃李寺, 榮州의 浮石寺, 洪州의 天藏寺 등은 스님의 鍊道하던 道場이요. 金剛山의 摩訶衍, 安邊의 釋王寺, 梁山의 通度寺, 東萊의 梵魚寺, 順天의 松廣寺, 求禮의 華嚴寺, 陜川의 海印寺 등은 宗師의 住錫하던 緣地이다. 1904年 봄 五臺山에 들어갔다가 金剛山을 거쳐 安邊 釋王寺에 이르러 五百羅漢造成佛事의 證師로 있다가 回向한 후 忽然히 자취를 감추어 간 곳을 몰랐다. 들은 바에 依하면 師는 長髮儒服으로 甲山(咸鏡道 三水甲山) 江界等地를 다니며, 或은 村齋에서 野老들과 벗을 삼고 或은 市井에서는 行人으로써 俗人들과 같이 잔을 나누는 등 聖者의 無蹤을 보이면서 蘭州라고 自號하였다. 1912年 4月 25日에 世壽 64, 법랍 56살을 一期로 入寂하였다. 入寂當時 洞民의 말에 依하면 하루는 스님이 울타리 밑에 앉아 學童들의 除草하는 光景을 보다가 문득 누우면서 내가 몹시 피로하다 하기에 房으로 모셔다 눕혔더니 말도 않고 먹지도 않으며 呻吟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에 忽然히 일어나 붓을 잡고
心月孤圓 光呑萬像
光境俱忘 復是何物
이란 임종게를 손수 쓰고는 一圓相을 그린 後, 붓을 던지고 右脇으로 奄然히 遷化하였다 한다. 宗師의 行止의 超然함과 任運自在함은 元曉를 聯想할 수 있다. 1903年 梵魚寺에서 海印寺로 가는 途中에서 一絶을 읊었으니,
識淺名高世危亂 不知行處可藏身
漁村酒肆豈無處 但恐匿名名益新
이것을 보면 스님이 머물기에는 世間이 너무나 좁았으며 宗師가 對하기엔 世人들은 너무나 喃喃하였다. 어찌
酒或放光色復然 貪嗔煩惱送驢年
佛與衆生吾不識 平生宜作醉狂僧
을 읊으지 않으랴! 그리고 다음과 같은 頌도 있다.
世與青山何者是 春光無處不開花
傍人若問惺牛事 石女心中却外歌
⟪한국불교소의경전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