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사에 능인선원 건축, 송만공 선사의 위업
[洪城] 忠南 禮山郡 德山面 德崇山 中腹에 잇는 德壽寺는 距今 一千二百六十年前 新羅文武王 五年에 創建된 古刹로서 附近西, 五個郡에서는 勝地라고 稱할만큼 佳麗한 風景은 湖西金剛이라고 한다 그동안의 盛衰는 歷史가 未詳하야 一一이 알 수 업스나 近年에 와서 매우 沈滯하엿던 中 明治十年次에 全朝鮮佛敎界의 彗星인 宋滿空 禪師가 前記德壽寺에 住錫하자 그 沈滯한 狀態를 遺憾으로 생각하고 改修한 結果 內容과 外觀이 充實하게 되여 지금은 매우 盛況으로 男女僧侶數가 百數十名이나 된다 하며 前記宋滿空 禪師는 여러 首座를 爲하야 自己의 私有인 財産을 全部 그 寺刹에 寄贈함과 同時에 五千圓이란 巨額을 내 이어 能仁禪院이란 大建物을 지난 一月中부터 起工하야 方今 建築中이라는 바 오는 七月末頃에 竣工이 되리라고 하며 法堂 大雄殿도 다시 建築할 豫定이며 其他 寺內公園이며 貯水池等도 設計中에 잇다는 바 前記德壽寺는 압흐로 大寺刹이 되리라고 한다
忠淸南道禮山郡名所として知られる德山面斜川里德崇山は奇峰怪岩をもつて像どり亭々たる樹木蒼鬱として全山常に翠松蔭に蔽(?)はれ淸洒なる玉水は谷間を縫ふて流れ, 實に仙境の感を深くするものがある. 思ふに造物翁は彼の金剛山の模型を此處に作りしにあらずやとの感あらしめその風景の絶佳なること到底紙筆をもつては盡し難くこの山中にある數寄の歷史を語る定慧寺, 修德寺は考古の資料に富み且觀賞に比類なき處にしてこの兩寺刹は今より一千二百六十年前新羅文武王五年元曉國師の創建に係る古刹にして昨年宋滿空禪師が總經費一萬五千圓を投じて近代の華美を加味して重修し境內に高さ二十五尺幅十五尺の大石佛を新造しあり今昔の好對照となる唯一の探勝地である經路は慶南線揷橋驛より德山溫泉まで自動車にて二十分なほ先へ進むこと(徒步)二十五町にして德崇山修德寺を經て定慧寺に入る當寺地內には百餘名收容の旅舍設備もある.(寫眞は修德寺全景)
전조선선원(禪院)에서 수도(修道)하는 선승(禪僧)들의 수좌대회(首座大會)가 지난 七일 八일 량일간에 긍하야 부내 안국동(安國洞) 四十번지에 잇는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 대법당(大法堂)에서 열리엇섯다 이 모임의 중요한 의의(意義)는 차츰 쇠퇴의 도정에 서잇는 조선불교 선종(禪宗)의 부흥운동과 단결운동의 첫거름으로서 수도승의 선량(禪糧)과 선의(禪衣)의 긔초를 흔들리지 안토록 하기 위하야 조직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의 확장과 선종종규(禪宗宗規)의 재정 기타 각종 규약을 제정키 위함이라 한다 정각이 되자 송만공(宋滿空)씨 사회로 의사(議事)가 진행되니 의장(議長)으로 긔석호(奇昔湖)씨가 피선되여 의안작성위원(議案作成委員)의 제출한 모든 의안을 축조토의(逐條討議)한 후 모든 금후의 진행방침을 결정하고 조선불교선종 종무원규(宗務院規)를 비롯하야 六종의 규약을 통과한 후 알에와가티 임원(任員)을 선거하고 성황리에 무사페회하얏다
宗正 申慧月, 宋滿空, 方漢岩, 院長 吳惺月, 副院長 薛石友, 理事 金寂音, 鄭雲峯, 李兀然, 禪議員 奇昔湖, 河龍峯, 黃龍吟 外十二人
조선에 불교(佛敎)가 드러온 이후 처음이라고 하야도 과언이 안인 전선의 선원(禪院)에서 수도(修道)하는 선승(禪僧)들의 수좌대회(首座大會)가 지난 七, 八 량일간에 긍하야 시내 안국동(安國洞) 四O 번지에 잇는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 대법당(大法堂)에서 열리엇섯다 이 모임의 중요한 의의는 차츰 쇠퇴의 도정에 서잇는 조선불교선종(朝鮮佛敎禪宗)의 부흥운동(復興運動)과 다못 단결운동의 첫거름으로서 수도승(修道僧)의 선량(禪糧)과 선의(禪衣)의 긔초를 흔들리지 안토록 하기 위하야 조직된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의 확장과 선종종규(禪宗宗規)의 재정 기타 각종 규약을 제정키 위함이라고 한다 당일은 전선수도원으로부터 속속 상경회집한 三百여회중을 비롯하야 다수의 방청객으로 장내는 실로 립추의 여지가 업는 대성황을 이루엇섯다는 바 정각이 되자 송만공(宋滿空)씨의 사회로 의사가 진행되니 의장(議長)으로서 긔석호(奇昔湖)씨가 피선되어 의안작성위원(議案作成委員)의 제출한 모든 의안을 추조토의(追條討議)한 후 모든 금후의 진행방침을 결정하고 조선불교선종 종무원원규(宗務院院規)를 비롯하야 六종의 규약을 통과한 후 아래와가티 임원(任員)을 선거하고 성황리에 무사폐회하얏다고 한다
宗正 申慧月, 宋滿空, 方漢岩, 院長 吳寂月, 副院長 薛石友, 理事 金惺音, 鄭雲峯, 李兀然, 禪議員 奇昔湖, 河龍峯, 黃龍吟 外十二人
[공주] 충남 공주군(公州郡) 대본산 마곡사(麻谷寺)는 충남에 잇는 단 하나의 대본산 사찰로 七十二개의 말사를 가지고 수만의 신도를 가진바 금번 마곡사주지가 만기로 사임하게 되자 그 후임 선거에 수많은 후보자가 출마하야 맹렬한 암중?악을 하엿으나 결국 이들 후보자의 선거를 일축하고 대선지식의 소유자인 조선불교선학종무원 종정(朝鮮佛敎禪學宗務院宗正) 송만공(宋滿空)씨를 추대하기로 결정하야 씨의 출마를 수차 교섭하엿으나 적임이 아니라고 사양하므로 다시 번의를 재촉하엿다는바 과연 출마할는지 의문이라고 한다.
忠南 公州郡 麻谷寺는 今般 第八世 住持選擧로 多少의 波瀾이 잇섯다 한다 麻谷寺는 忠南에 唯一한 大本山으로 七十二個의 末寺와 八百餘 僧侶를 擁有하엿는데 現在住持는 事情에 依하야 辭職하고 그 後任을 選擧키 爲하야 三人의 候補者가 나서서 八百餘僧侶는 三波로 나누어 選擧戰을 하는 中이엇다 이 ᄯᅢ에 寺中有志는 이러케 된 難局面에는 이를 收拾할 만한 大善知識의 出馬가 必要하다 하고 朝鮮佛敎禪宗宗務院宗正 宋滿空氏에게 出馬를 여러번 懇請하엿던 바 同氏가 이에 不應함에 不拘하고 前記 三人의 候補者들은 모다 候補權을 抛棄하고 選擧日인 六日午前十時에 麻谷寺에 有格者가 會集하야 投票한 結果 宋滿空氏가 絶對多數로 當選되얏다 한다 代表 李性海氏는 上城하야 宋滿空氏의 就任을 懇請하엿스나 同氏는 ᄭᅳᆺᄭᅳᆺ내 不應함으로 一般 佛敎界에서는 한 注目거리가 된다고 한다
二十六일부터 개회된 조선불교 三十一 본산 주지회동의 지시사항과 주의사항은 다음과 갓다
指示事項
一、朝鮮佛敎 今後의 振興策
二、佛敎中央敎務院과 中央專門學校의 改善策如何
注意事項
一、寺風의 振肅에 關한 件
二、住持의 職務?守에 關한 件
三、僧紀肅正에 關한 件
四、基本財産並建物維持修理 其他各種 積立金蓄積에 關한 件
五、寺有建物維持管理에 關한 件
六、寺宇佛像其他 貴重品保管에 關한 件
七、豫算의 經理에 關한 件
八、本寺及布敎所의 保護監督에 關한 件
九、佛徒養成에 關한 件
一○、財團法人朝鮮佛敎中央敎務院에 대한 出資勵行에 關한 件
出席住持氏名
奉恩寺 姜性仁 龍珠寺 姜大蓮 奉先寺 金松月 傳燈寺 金正燮 法住寺 張石霜 麻谷寺 宋滿空 威鳳寺 金振月 寶石寺(寺務取扱) 朴定宣 大興寺 朴映熙 白羊寺 宋宗憲 松廣寺 林錫珍 華嚴寺 鄭秉憲 仙巖寺 朴秉芸 海印寺 李古鏡 通度寺 金靖錫 梵魚寺 車相明 桐華寺 尹相範 銀海寺 朴度洙 孤雲寺 金泳鎬 金龍寺 李炳浩 祗林寺 沈寶淵 貝葉寺 李明敎 成佛寺 李寶潭 永明寺(寺務取扱) 權泰錫 法興寺 同 普賢寺 金法龍 乾鳳寺 金寶蓮 楡岾寺 金坦月 月精寺 李鍾郁 釋王寺 李幻海 歸州寺 柳寶庵 朝鮮佛敎中央敎務院 理事 金尙昊 同同 黃金峰
佛教界의 慧星
住持 宋滿空氏
氏는 全北胎性으로 片母를 따라 十五歲時에 忠南瑞山天藏寺에 入하야 佛門에서 五十餘年間修道한 今年六十八歲의 法師로 德望이 높고 智識이 豊富한 人物이다.
오늘의 朝鮮佛敎界에 名僧은 누구누구이며 學者는 어느분 어느분이며 思想家는 몇사람이나 되는지 나는 모릅니다. 어쨌든 節介가 없고 氣魄이 喪失된 世界에는 아무런 信仰도 바랄 수 없습니다.
흔히들 生活條件과 周圍環境의 不利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이란 얼마나 自己責任의 廻避와 轉嫁를 꾀하는 根性을 가젓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自己無力의 暴露에 不過하는 것입니다. 또는 그것은 自欺欺人의 훌륭한 手段도 되고 惰性隱蔽의 방패도 되는 것입니다.
H庵에서 점심 초대가 잇엇습니다. 거기는 女僧 스님만이 사는 修行場입니다. 내가 오래전부터 잘 아는 今年 七十된 “염수자”도 잇고 “능수자”도 잇고 나와 ××同窓卒業生인 K君의 慈堂도 오늘 처음 보앗습니다. 모다 十餘人의 大衆, 그이들의 生活은 參禪입니다.
床에는 무우와 버섯을 너흔 국 한그릇 동김치 짠김치, 콩자반 그러고 밥에는 팟과 조를 섞엇읍니다. 나는 만끽하엿읍니다. 포구국보다 조팟밥보다 그이들의 素朴하고 純粹한 人情이엇읍니다. 慈悲와 人情과 柔和가 佛敎生活人의 特徵이라면 그이들은 그 우에 “女性的”이라는 하나의 더한 要素로서 더욱 그러하엿읍니다.
×兄! 날시가 몹시 추웁습니다. 높은 嶺上이요 깊은 山골에다 더구나 눈뒤의 바람이라 정말 살을 어이는 것 같습니다. 몇 度나 되는지는 모르나마 서울 추위도 이 以上될 것 같지는 안습니다. 절간은 방따슨 맛으로 산다는 말과 같이 아닌게 아니라 따근한 방안에 앉어 고요히 타는 람푸를 바라보며 빈골을 울리는 바람소리를 듣는 것은 여간한 雅趣로운 風情이 아닙니다. 문듯 夜壑風寒松子落이라는 鏡虛 스님의 禪句가 생각히움니다. 그러다가 이런 밤이면 거리의 찬 사람들을 생각하엿다는 톨스토이의 모습도 눈앞에 나타낫읍니다.
×兄! 가끔 바람소리 속으로 건너 蓮花寺의 念佛 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念佛 소리에 무한한 宗敎的 魅力을 느끼며 그 心境을 끝없이 부러워합니다. 얼마나 高貴하고 平和로운 生活態度입니까? 徹底한 謙虛와 深刻한 反省으로 自己의 無力과 永劫의 罪業을 痛感할 때 傲慢한 自力, 一切의 計較를 放下投擲하고 오로지 彌陀의 本願에 歸任하는 마음 얼마나 갸륵하고 多情하고 또한 崇嚴한 것입니까? 佛의 無限한 慈悲에의 歸依 그 歸依할 힘조차 없는 罪의 아들을 당신이 스스로 나아가 크다란 救濟의 손을 펴서 안어주신다는 信仰이 終對他力 救濟의 原理가 아니겟읍니까? 大自力의 自力, 自力의 極致인 禪家의 眼中無人의 大自信도 泰然不動의 自我, 不惜身命의 意氣도 뼈를 깍는 듯한 反省과 謙虛의 根柢우에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러한 他力에의 信仰도 이미 이러한 境地에 왓을 때는 벌서 하나의 偉大한 悟가 아닐 수 없으매 이 點이 禪의 廓然大悟와 다를 바 없으며 同時에 아무런 禪의 自力도 한번 廓然大悟한 身心脫落底의 境地는 곧 天意隨順 그대로 他力 그것이 아니겟읍니까? 大安心大立命의 遊戱自在三昧의 絶對世界, 거기에 무슨 自力他力의 區別이 잇겟읍니까? 家家門路透長安을 한 句 불러보아도 조흘 것 같습니다.
×兄! 벌서 아홉時가 되엇읍니다. 바람은 아직 불고 念佛 소리는 끈첫읍니다. 나도 자야하겟읍니다. 나는 지금 자리에 들면서 西方 十萬億國土 저쪽의 極樂世界를 생각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月×日
×兄! 苦를 避하고 樂을 찾는 것이 人間의 本性이 아니라 樂을 피하고 苦를 찾는 것이 人間의 本質인가 봅니다. 憂鬱의 얼마나 달큼한 유혹입니까? 悲哀의 얼마나 美로운 愛着입니까? 아 얼마나 뿌리깊은 人間의 感傷性입니까! (끝)
楡岾寺에서
경편위는 그간 소개되지 않았던 만공스님과 관련된 신문기사 30여 건을 발굴하였다. 1931년 부터 최근 관련기사까지를 목록화하였으며 약 200여 건을 목록화하였다.
그 가운데 1931년부터 ⟪동아일보⟫ 만공선사의 입적기사를 다룬 1947년 ⟪민중일보⟫ 까지 옛 기사 20여건을 발췌하였다. 여기에 1921년부터 1937년까지의 만공스님 기사가 실려있는 ⟪조선총독부관보⟫ 8건을 더하여 모두 30여건의 기사자료를 자료집에 수록하였다. 실린 매체는 각 ⟪매일신보⟫ 8건, ⟪조선중앙일보⟫ 4건, ⟪조선신문⟫ 1건, ⟪동아일보⟫ 6건, ⟪불교시보⟫ 1건, ⟪민주일보⟫ 1건, ⟪대한불교⟫ 1건, ⟪민중일보⟫ 1건, ⟪대한불교⟫ 1건 등 24건과 ⟪조선총독부관보⟫ 8건이다.
특히 주목되는 기사는 ⟪매일신보⟫ 1931년 5월 6일자, 5월 27일자 이다. 여기에는 만공스님의 구휼미(救恤米) 보시(布施)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시에 보은하기 위하여 예산군 덕산면 8개리(里)의 주민들이 돈을 모아 만공스님의 송덕비를 건립 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90년대에 정묵스님과 주경스님 등 수덕사 소임자 스님 10여 명이 제보를 받고, 윤봉길의사 사당 근처 농가에서 깨진 비석을 수덕사 율원(현재 만공기념관) 앞에 복원해 놓았으나 그동안 이 비석의 건립 경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금번 경편위에서 위의 기사를 통해 만공송덕비 (滿空頌德碑)가 해당 비석임을 밝혀 낼 수 있었다.
1932년 6월 2일자 ⟪매일신보⟫ 를 통해서 정혜사 능인선원이 건축된 경과를, 1933년 7월 16일자 ⟪ 조선중앙일보⟫ 를 통해서 수덕사 준공에 관한 경과를 알 수 있다. 1940년 6월 15일자 ⟪불교시보⟫를 통해서 만공스님과 함께 한암, 혜월, 용성스님 등이 ‘조선불교의 사천왕’과 같은 흥미로운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1946년 11월 24일자 ⟪민주일보⟫ , 11월 26일자 ⟪동아일보⟫ 를 통해서 만공스님의 입적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관보⟫ 8건의 경우 만공스님이 보덕사, 수덕사, 마하연, 마곡사 등의 주지 이·취임과 관련된 정보들을 기록하고 있어서 만공스님의 행적과 해당 사찰의 주지 소임 정보를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해당자료들은 국립중앙도서관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와 NAVER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 서 발췌하였다. 인터넷 아카이브에는 해당면 전문을, 자료집에서는 해당하는 부분만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
경허록·만공법어편찬위원회(이하 '경편위')에서는 1931년부터 최근까지의 만공 선사와 관련된 신문 기사를 조사하여 약 200여 건을 목록화 하였다. 그중 1931년 『동아일보』에 실린 만공 선사의 입적 기사부터 1947년 『민중일보』까지의 기사 20여 건을 발췌하고, 1921년부터 1937년까지 만공 선사 관련 기사가 실린 『조선총독부관보』 8건을 추가하여, 총 30여 건의 기사 자료를 자료집에 수록하였다.
수록된 매체는 『매일신보』 8건, 『조선중앙일보』 4건, 『조선신문』 1건, 『동아일보』 6건, 『불교시보』 1건, 『민주일보』 1건, 『대한불교』 1건, 『민중일보』 1건 등 24건과 『조선총독부관보』 8건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기사는 『매일신보』 1931년 5월 6일자와 5월 27일자이다. 이 기사에는 만공 선사의 구휼미救恤米 보시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구휼미 보시에 보답하기 위해 예산군 덕산면 8개 리의 주민들이 돈을 모아 만공 선사의 송덕비를 건립 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송덕비에 대한 행방은 알 수 없었으나 1990년대에 정묵 스님과 주경 스님을 비롯한 수덕사 소임자 스님 10여 명이 제보를 받고, 윤봉길 의사 사당 근처 농가에서 깨진 비석을 찾아 수덕사 율원(현재 만공기념관) 앞에 복원하게 되었다. 그동안 이 비석의 건립 경위를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이번 경편위에서는 위의 기사를 통해 이 비석이 바로 만공송덕비滿空頌德碑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다음으로, 1932년 6월 2일자 『매일신보』의 기사를 통해 정혜사 능인선원의 건축 경과를 알 수 있으며, 1933년 7월 16일자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를 통해 수덕사 준공에 관한 경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1940년 6월 15일자 『불교시보』의 기사를 통해 만공 선사와 함께 한암, 혜월, 용성스님 등이 ‘조선불교의 사천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1946년 11월 24일자 『민주일보』와 11월 26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에는 만공 선사의 입적 상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이외에 『조선총독부관보』의 8건은 만공 선사의 보덕사, 수덕사, 마하연, 마곡사 등에서의 주지 이·취임과 관련된 정보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만공 선사의 행적과 해당 사찰의 주지 소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상의 자료들은 국립중앙도서관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와 NAVER 뉴스라이브러리를 통해서 발췌하였다. 인터넷 아카이브에는 해당면 전문을, 자료집에는 해당되는 부분만을 발췌하여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