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땅은 아름다워[高天麗地] 코리아[高麗]라 부르는 한반도에서 열강列强이 쟁리爭利와 세력 각축을 일삼던 구한말舊韓末, 누백년累百年 지속된 배불정책排佛政策에 시달린 근역槿域 불교계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대법大法이 은몰隱沒하여 불조佛祖의 혜명慧命 보존이 어려워졌을 때, 평지돌출平地突出하여 정법선맥正法禪脈을 중흥함으로써 불법佛法의 위기를 구출한 분이 바로 큰 선지식인 경허성우鏡虛惺牛 선사이시고, 민족의 천추千秋에 통한사痛恨事가 아닐 수 없는 일제 암흑 치하에서 경허의 선풍禪風을 대진大振하면서 항일 불교의 법등法燈을 높이 들었던 한국의 당당堂堂한 대장부가 누구였더냐. 바로 경허 화상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이어받아 상수제자上首弟子가 된 만공월면滿空月面 선사이셨다.
스님의 휘는 도암道岩이요, 법명法名은 월면月面, 법호法號는 만공滿空, 도호道號는 수산叟山이다. 속성俗姓은 송씨宋氏이니 여산후인礪山后人이다.
아버지의 휘는 신통神通이라 하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스님은 고종高宗 8년(1871) 신미辛未 3월 7일에 전북 태인군泰仁郡 태인읍泰仁邑 상일리上一里에서 태어나셨다.
어머니 김씨는 신령한 용龍이 구슬을 토吐하매 황홀한 광명을 발發하는 태몽을 꾸고 스님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스님이 두 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장차 세속의 일을 하지 않고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고승이 될 것이오."라고 말하면서도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고 출가를 할 것을 미리 걱정하였다.
스님의 휘는 도암道岩이요, 법명法名은 월면月面, 법호法號는 만공滿空, 도호道號는 수산叟山이다. 속성俗姓은 송씨宋氏이니 여산후인礪山后人이다. 아버지의 휘는 신통神通이라 하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스님은 고종高宗 8년(1871) 신미辛未 3월 7일에 전북 태인군泰仁郡 태인읍泰仁邑 상일리上一里에서 태어나셨다. 어머니 김씨는 신령한 용龍이 구슬을 토吐하매 황홀한 광명을 발發하는 태몽을 꾸고 스님을 잉태하였다고 한다. 스님이 두 살 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이 아이는 장차 세속의 일을 하지 않고 불문佛門에 들어가서 고승이 될 것이오."라고 말하면서도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고 출가를 할 것을 미리 걱정하였다. 스님이 열세 살 되던 계미년(1883) 겨울에 누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김제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올해 과세過歲(설을 쇰)를 하면 장수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모님이 아들을 데리고 금산사로 갔다. 도암道岩 소년으로선 생후 처음으로 대웅전에 모신 금색金色
스님이 열세 살 되던 계미년(1883) 겨울에 누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김제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올해 과세過歲(설을 쇰)를 하면 장수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모님이 아들을 데리고 금산사로 갔다.
스님이 열세 살 되던 계미년(1883) 겨울에 누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김제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올해 과세過歲(설을 쇰)를 하면 장수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부모님이 아들을 데리고 금산사로 갔다. 도암道岩 소년으로선 생후 처음으로 대웅전에 모신 금색金色의 등상불等像佛이며 염의染衣를 입은 스님들을 보는 순간, 자기 자신도 모르게 환희심歡喜心이 샘솟음을 막을 수 없었다.
며칠을 절에서 지내고 돌아온 소년은 출가위승出家爲僧할 뜻이 간절하였다. 아들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부모님은 크게 당황하여 종형從兄으로 하여금 출가하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도암 소년은 출가를 결심하고 야반삼경夜半三更에 초동樵童의 지게를 지고 전주全州 봉서사鳳棲寺로 몰래 갔다. 며칠 머무르는 동안 그 절 스님들은 소년이 비범非凡한 법기法器임을 직감했던지 출가하라고 권유하였으나, 그곳과는 인연이 없어서인지 마다하고 봉서사를 떠났다.
짚신을 벗어 작대기 끝에 매달아 둘러메고 맨발로 정처 없이 걸었다. 하늘에 닿을 듯한 푸른 태산준령泰山峻嶺이 눈앞에 우뚝하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는 속세의 잡념雜念을 씻어 주는 듯 즐겁기만 하고, 숲속에 핀 꽃들은 나그네를 반겨 주고, 재재거리는 산새소리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길을 가리키는 듯하였다. 피곤함도 잊은 채 한 가닥 오솔길을 따라가서 당도한 곳이 전주全州 송광사松廣寺였다.
의젓한 도암 소년을 스님들이 둘러싸고는 "너의 집이 어디냐? 무슨 일로 이 절에 왔느냐?" 하고 물었다. 도암 소년은 무작정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떠난 후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대답하니 스님들도 인자스럽게 대해 주면서 말했다.
"이 절에는 훌륭한 스님이 없고 논산論山 쌍계사雙溪寺에 훌륭한 진암眞岩 스님이 계시니, 찾아가 지도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도암 소년은 그 길로 논산 쌍계사로 갔으나 진암 노스님이 얼마 전에 계룡산 동학사로 옮겨 가셨다고 일러 준다. 다시 길을 물어 동학사로 달려가 진암 노스님을 찾아뵙고 출가할 뜻을 아뢰었다. 노스님이 열네 살의 도암 소년을 행자行者로 받아들여 같이 살게 하였으니, 때는 갑신년(1884)이었다.
도암 행자가 노스님과 둘이서 얼마 동안 함께 살다 보니 양식이 떨어졌다. 마침 젊은 스님이 동냥을 나간다기에 도암 행자도 따라나섰더니, 젊은 스님이 "스님도 아닌 유발동자有髮童子가 무슨 동냥을 할 수 있냐?"라고 말하였다. 도암 행자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얻어먹는 사람이 승속僧俗이 따로 있습니까?"라고 답하니, 젊은 스님은 아무 말 없이 동냥 동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냥 10여 일에 엽전 여덟 냥을 쥐고 돌아온 행자의 손을 꼭 잡은 노스님은 탄식하여 말하되, "이 못난 늙은 것이 남의 집 귀한 자제를 중도 만들기 전에 동냥부터 시키다니, 나같이 박복한 자는 세상에 드물 것이다." 하며 눈물을 짓는다. 도암 행자는 진암 노스님을 위로하며 말하였다.
"순舜임금도 독 장사를 하였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갑신년 10월 초순 어느 날, 중년 객승 한 분이 동학사에 왔기에 도암 행자도 나가 보았다. 큰 키에 도인의 풍모를 갖춘 데다가 뜻과 기운이 과감하고 굳세었으며 변재辯才를 갖춘 위풍이 당당하고 안광眼光이 뭇사람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 스님이 바로 서산瑞山 천장사天藏寺에서 보림保任하고 있던 당대의 위대한 선지식 경허鏡虛 화상이었다.
경허 화상은 아홉 살 때 경기도 시흥始興 청계사淸溪寺에서 계허桂虛 스님에게 축발수계祝髮受戒한 뒤 열네 살 때 절에 쉬러 온 박처사朴處士로부터 여름 한 철 글을 배웠는데, 재능이 놀라운 바 있었다. 그해 가을 은사恩師 계허 스님은 환속還俗하면서 경허 스님의 재주에 학문이 성취되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당대의 뛰어난 강백講伯인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에게 추천해 보냈다.
경허 화상은 아홉 살 때 경기도 시흥始興 청계사淸溪寺에서 계허桂虛 스님에게 축발수계祝髮受戒한 뒤 열네 살 때 절에 쉬러 온 박처사朴處士로부터 여름 한 철 글을 배웠는데, 재능이 놀라운 바 있었다. 그해 가을 은사恩師 계허 스님은 환속還俗하면서 경허 스님의 재주에 학문이 성취되지 못함을 애석히 여겨 당대의 뛰어난 강백講伯인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에게 추천해 보냈다. 동학사에서 경허 스님은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섭렵하고 스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