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월스님은 경허스님의 두 번째 제자였는데, 경허스님은 맏제자 되시는 분은 수월스님이시고 그 다음에 혜월스님이시고 세 번째는 만공스님이었어요.
3대 제자가 있었는데 경허스님이 그때의 그 관찰로서 이조 500년의 부처님의 법이 그야말로 참 사회, 정치하에서 그대로 일러서 ‘배불정책’하에서 불법이 외적으로 망하다시피 할 정도가 되었는 그 이면에 스님네들 자체도 역시 공부를 안 하고 그만 한 산중에 있으면 당파를 모아놓고 그만 노략질이나 하고 하니 그걸 일러서 ‘당초’, ‘땡초’라 그래요. 중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으면서도 땡초노릇을 하고 공부를 안 하고 하니까 경허스님이 제작 세 분을 모아놓고서 그래. 이제 참, 책임할당을 하기를
“수월스님은, 수월이는 내가 데리고 북쪽으로 가마. 혜월이 너는 남방으로 내려가거라. 만공 너는, - 지금의 예산 정혜사라고 하는 그 지방을 내포라고 그러는데 - 내포인 너의 본고장을 지켜라.”
그러고 갈라져서 이제 참 세갈래로 한 분은 본 자리에 머무르시고 그래서 이제 경허스님은 수월스님을 데리고 금강산으로 이북으로 넘어가시게 되었고 혜월스님은 이제 법주사로부터 직지사로, 청암 수도사로, 도리사로, 그래 이제 동화사로, 파계사로, 영천 은해사로 이제 이렇게 내려오시면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시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중에도 스님네들 중에도 그야말로 땡초노릇을 하는 그런 방랑한 스님네도 있지만은 그 개중에는 또 역시 참 머리 깎고 중된 보람으로 공부해야 되겠다는 뜻을 가진 분들도 허다 있었다는거에요.
그러니 그네들을 이끌어주는 이가 없으니까 그만 방랑패에 몰리게 된 것도 있어요. 올바른 지도자가 나서는 이가 없으니까 그런 차에 혜월스님이 이제 이쪽으로 내려오시면서 이제 공부할 수좌들을 집결을 시키니까 절절마다 다 모이게 되는 절절마다 다 모이게 되니까 이제 혜월스님은 밑에 그 가운데서 조금 그야말로 공부한다는 열을 가졌다든가 좀 지혜로운 안목을 가졌던 이가 있으면 거기 전부 이제 조실스님으로 맡기서 그 선방을 운영하게끔 하고 그리고 이제 끝으로 내려오시게 된 것이 영천 은해사, 영천 은해사에 와서 이제 우리 은사스님 ‘운’자 ‘암’자인데 운암스님을 만나서 그 때부터 우리 스님이 이제 혜월 스님을 모시게 되었어요.
그래 모시고 이제 내려온다는 것이 이제 통도사로 내려오시게 되었고 통도사에서도 또 암자 내원사로 가고 또 미타암으로 가고, 그 길로 거쳐서 이제 범어사로 내려오셨고, 그렇게 범어사에 와서 계시다가 이제 선암사로 내려왔었고 선암사 와 계시다가 이제 여기 안양사에 와서 얼마 계시다가 그래 열반에 드셨어요. 그리고 이곳에는 이제 다른 분을 들먹이기보다 “혜월스님의 열반처”다. 이렇게.
(여기 지금 혜원 선생님 친필 글씨가 있는데) 그러니까 이제 혜월스님이 직접 쓰셨다는 글이, 다른 데는 지금 없습니다. 없고, 여기에 계시던 그 남은 유품으로 이제 심시불(心是佛)이나 천중천(天中天)이나 직접 이제 쓰신 것, 저 것인데 저 글씨를 보면 지금 그야말로 속가의 아이들 ‘하늘천 따지’ 배우는 아이들보다도 더 글을 못 썼지 않습니까?
…
[스님 젊으실 때 정혜사에서 수도 하셨지요? 그 때 이야기 좀 해 주시지요.]
그래서 제가 정혜사 있을 그 때는 만공스님 열반하시던 그 해, 참 마지막으로 거기 가서 이제 그 한 철을 이제 같이 지냈는데 그때 거기는 만공스님의 밑에 수제자들로서 참 현대 말로 참 선지식, 도인 스님들이 많이 계셨어요.
그래 많이 계시고 지금 먼저 나하고 같이 있었던 ‘원담’이라고 지금 거기 방장하는 이에요. 원담이 그 때 나하고 거기서 같이 있었고, 또 정혜선원은 이제 역시 말하자면 만공 스님하고 우리 노스님하고 사형사제지간이기 때문에 한 집안 같이 여겼어요. 심적으로는. 중의 집에서 무슨 일가친척을 찾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중생세계의 한 모통이기 때문에, 그 정혜사는 지금도 역시 큰 일이 있으면 내 곁으로 오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정혜사는 그런 인연이 있는 곳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