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덮인 계곡과 산길을 거쳐 막상 해인사 백련암에 당도해 보니 우리가 만나뵈러 간 포산스님은 이미 그곳을 떠나 충남의 개태 도광사(道光寺)에 머물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맥이 빠지긴 했지만 만공(滿空)스님의 제자인 법안(法眼)스님이 그곳에서 9년째 지장기도를 계속하시던 때인데다 포산스님의 제자인 제선()스님 등 10여 분의 스님들이 영천스님은 물론 동행한 우리 두 사람을 반가이 맞아주시는 통에 나는 백련암에서 1주일을 머물며 팔만대장경과 산내 암자들을 두루 참배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말로만 들어 왔던 명소와 성보 문화재들이라 나로서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근대 불교의 선풍(禪風)을 불러일으킨 중흥조 경허스님의 방함록은 나의 눈길을 한동안 붙잡았다. 내가 스승으로 모실 포산스님의 스승이신 만공스님의 스승 되시는 어른의 친필이니 어찌 그 앞에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밖에도 일주문을 비껴 서 있는 홍제암 부도전은 사명스님이 입적한 곳이라는 설명에 잠시 숙연한 마음으로 옛날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해인사 참배를 대강 끝내자 나는 다시 영천스님을 따라 며칠 전 거쳐왔던 길을 거슬러 낙동강을 건넜다. 이어서 대구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이른 후 다시 호남선으로 바꿔 탄 끝에 도광사에 당도해 보니 어느새 정월은 다 지나가고 2월이 되어 있었다.
1949년 1월의 기억 "구도의 길을 찾아서" ⟪경해법인회고록 신고는 원광이 되어⟫ 39쪽.
경허(鏡虛) : (1849~1912) 초명은 동욱(東旭), 법명은 성우(惺牛), 법호는 경허(鏡虛), 자호는 난주(蘭州) 속성은 송(宋)씨, 부명은 두옥(斗玉), 모는 밀양(密陽) 박씨, 1849년 8월 24일 전주(全州) 자동리에서 출생. 9살 때인 1857년 관악산(冠岳山) 청계사(淸溪寺) 계허대사(桂虛大師)에게서 입산득도. 동학사(東鶴寺) 만화원오(萬化圓悟)화상으로부터 일대시교를 수학하였고, 천장사(天藏寺) 용암혜언(龍岩慧彦)의 법을 이어 받았다.
1899년 가을 가야산(伽倻山)해인사(海印寺) 선원조실로 초대받고, 이울러 고종의 칙명으로 추진하는 대장경인경불사의 증명법사와 해인사수선사창설의 법주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선사가 해인사에 남긴 글은
해인사수선사방함록서(海印寺修禪社芳啣錄序)
해인사수선사창건기(海印寺修禪社創建記)
결동수정혜동생도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도率同成佛果契社文)
상포계서(喪布계序)
해인사구광루(海印寺九光樓)(칠언절)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칠언절)
1912년 4월 25일 갑산(甲山)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에서 심월고원(心月孤圓), 광춘만상(光春萬像), 광경구망(光境俱忘), 부시하물(復是何物)이란 임종게를 남기고, 세수 64, 법랍 56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가야산해인사지, 지관스님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