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덮인 계곡과 산길을 거쳐 막상 해인사 백련암에 당도해 보니 우리가 만나뵈러 간 포산스님은 이미 그곳을 떠나 충남의 개태 도광사(道光寺)에 머물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맥이 빠지긴 했지만 만공(滿空)스님의 제자인 법안(法眼)스님이 그곳에서 9년째 지장기도를 계속하시던 때인데다 포산스님의 제자인 제선()스님 등 10여 분의 스님들이 영천스님은 물론 동행한 우리 두 사람을 반가이 맞아주시는 통에 나는 백련암에서 1주일을 머물며 팔만대장경과 산내 암자들을 두루 참배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말로만 들어 왔던 명소와 성보 문화재들이라 나로서는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근대 불교의 선풍(禪風)을 불러일으킨 중흥조 경허스님의 ⟪방함록⟫은 나의 눈길을 한동안 붙잡았다. 내가 스승으로 모실 포산스님의 스승이신 만공스님의 스승 되시는 어른의 친필이니 어찌 그 앞에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밖에도 일주문을 비껴 서 있는 홍제암 부도전은 사명스님이 입적한 곳이라는 설명에 잠시 숙연한 마음으로 옛날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해인사 참배를 대강 끝내자 나는 다시 영천스님을 따라 며칠 전 거쳐왔던 길을 거슬러 낙동강을 건넜다. 이어서 대구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대전역에 이른 후 다시 호남선으로 바꿔 탄 끝에 도광사에 당도해 보니 어느새 정월은 다 지나가고 2월이 되어 있었다.
1949년 1월의 기억 "구도의 길을 찾아서" ⟪경해법인회고록 신고는 원광이 되어⟫ 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