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目次) | 追加 14-00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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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에 “앞으로 올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實相을 낼 것이니, 응당 알라. 이 사람은 가장 으뜸가는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대혜大慧 스님은 “만약 강항强項한 사람 중에서 간혹 몇 사람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불법이 어찌 오늘에 이르렀으리오.”라고 하였다.
대개 용맹스런 뜻을 일으켜 법의 근원을 사무치는 이가 말법 세상에도 없지 않았으므로 불조가 이런 말씀을 후세에 남겼던 것이고, 또 그만한 사람이 드물어 불조의 혜명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뉘라서 여기에서 장부의 뜻을 갖추고 자기 본성을 사무쳐 깨달아 가장 으뜸가는 공덕을 성취하여 큰 지혜 광명의 뜻을 후오백세의 세상에 널리 펼칠 수 있겠는가? 바로 우리 경허 스님이 그러한 분이다.
스님은, 휘는 성우惺牛이고 초명은 동욱東旭이며, 경허는 그 호이다. 속성은 송씨宋氏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부친은, 휘는 두옥斗玉이고 모친은 밀양密陽 박씨朴氏이다. 철종 7년2) 정사년(1857) 4월 24일에 전주 자동리子東里에서 태어났는데, 분만한 뒤 사흘 동안 울지 않다가 목욕시킬 때에 비로소 울음을 터트리니, 사람들이 모두 신이한 일이라 하였다.
스님은 일찍 부친을 잃고 아홉 살 때 모친을 따라 상경하여 경기도 광주廣州의 청
계사에 들어가 계허桂虛 스님을 은사로 삭발하고 수계하였다. 스님의 형도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니, 모두 모친이 삼보에 귀의하여 지성으로 염불하였던 까닭에 두 아들을 출가시킨 것이었다.
스님은 나이가 아직 어릴 때에도 뜻은 마치 거인巨人과 같아서 아무리 곤고困苦한 일을 만나도 지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없었다. 늘 땔나무를 하고 물을 길어 밥을 지어 스승을 섬기느라 열네 살이 될 때까지 글을 배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한 선비가 청계사에 와서 함께 여름 한철을 보내게 되었다. 그 선비가 절에 와 지내면서 소일거리로 스님을 불러 곁에 앉혀 놓고 ⟪천자문⟫ 을 가르쳐 보았더니 배우는 족족 곧바로 외웠다. 또 ⟪통감⟫ · ⟪사략⟫등의 책들을 가르쳤더니 하루에 대여섯 장씩 외웠다. 그 선비가 탄식하기를, “이 아이는 참으로 비상한 재주이다. 옛날에 이른바 ‘천리마가 백락伯樂을 못 만나 소금수레를 끈다’라는 격이로구나. 훗날 반드시 큰 그릇이 되어 일체중생을 구제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계허 스님은 환속하면서 스님의 재주와 학문을 성취하지 못함을 애석하게 여겨 추천하는 편지를 써서 스님을 계룡산 동학사 만화萬化 스님에게 보냈다. 만화 스님은 당대에 뛰어난 강백이었다
만화 스님은 영특한 스님을 보고 기뻐하면서 가르쳤는데 몇 달이 안 되어 글을 잘 짓고 경전의 뜻을 새길 줄 알아 일과로 배우는 경소經疏를 한번 보면 곧바로 외웠다. 그리하여 하루 종일 잠자고도 이튿날 논강할 때 글 뜻을 풀이하는 것이 마치 도끼로 장작을 쪼개고 촛불을 잡고 비추는 듯 명쾌하고 분명하였다.
강사가 잠이 많음을 꾸짖고는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특별히 ⟪원각경⟫ 중에서 소초疏抄 5, 6장 내지 10여 장을 일과로 정해 주었는데, 스님은 여전히 잠을 자고도 종전처럼 외니, 대중이 모두 미증유한 일이라고 탄복하였다.
이로부터 재명이 높이 드러났고 영남과 호남의 강원들에 두루 가서 공부하니, 학문은 날로 높아지고 견문은 날로 넓어져 유가와 노장의 글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스님은 천성이 소탈하여 겉치레를 꾸미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 경을 볼때 대중들은 모두 가사 장삼을 걸치고 단정히 앉아 땀을 흘리며 고생을 참고 있는데, 스님은 홀로 옷을 벗고 격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강사인 일우一愚 스님이 그 모습을 보고 문인들에게 “참으로 대승 법기大乘法器이니, 너희들이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다
23세에 스님은 대중의 요청으로 동학사에서 강석을 열어 교의敎義를 강론함에 드넓은 물결처럼 거침없으니, 사방의 학인들이 몰려왔다.
하루는 지난날 계허 스님이 자신을 보살피고 아껴 주었던 정의情義가 생각나서 한번 찾아가 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대중에게 말한 후 출발하였는데, 가는 도중에 갑자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다.
스님은 급히 발걸음을 옮겨 어느 집 처마에 들어갔더니, 주인이 내쫓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집으로 옮겨 가도 마찬가지였다. 온 동네 수십 집 모두 몹시 다급하게 내쫓으며 큰 소리로 꾸짖기를, “지금 이곳에는 역질이 크게 창궐하여 걸리는 자는 곧바로 죽는다. 너는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사지死地에 들어왔는가?”라고 하였다.
스님은 문득 이 말을 듣고는 모골이 송연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흡사 죽음이 눈앞에 임박하고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어 일체 세간의 일들이 모두 덧없는 꿈 저편의 청산인 것만 같았다. 이에 스스로 생각해 말하기를, “이 생에 차라리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에 구속 받지 않고 조사의 도를 찾아서 삼계를 벗어나리라.”라고 하였다.
발원을 마치고 평소에 읽은 공안들을 미루어 생각해 보니, 교학을 공부한 습성으로 모두 알음알이가 생겨 참구할 여지가 없었다. 오직 영운 선사靈雲禪師의 ‘여사미거마사도래화驢事未去馬事到來話’5)만은 마치 은산철벽을 마주한 것처럼 도무지 알 수 없기에 곧바로 “이 무슨 도리인고?”라고 참구하였다.
계룡산에 돌아온 뒤 대중을 해산하며 말하기를, “그대들은 인연 따라 잘 가시게. 나의 지원志願은 여기(講學)에 있지 않네.” 하고는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전심으로 화두를 참구하였다. 밤에 졸음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기도 하고, 시퍼렇게 간 칼을 턱밑에 세우기도 하였다. 이렇게 석 달을 지나자 참구하는 화두가 순일무잡해졌다.
한 사미승이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는데 속성은 이씨李氏였다. 그의 부친이 다년간 좌선하여 스스로 개오한 곳이 있어 사람들이 그를 이 처사라 불렀다. 그 사미승의 스승이 마침 이 처사의 집에 가서 이 처사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처사가 “중이 된 자는 필경 소가 되지요.”라고 하니, 사미승의 스승이 “중이 되어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하고 단지 신도의 시주만 받으면 반드시 소가 되어 그 시은을 갚게 마련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처사가 그 말을 듣고 꾸짖기를, “소위 사문으로서 이처럼 맞지 않은 대답을 한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사미승의 스승이 “나는 선지禪旨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대답해야 옳겠소?” 하니, 이 처사가 “어찌하여 소가 되면 콧구멍을 뚫을 곳이 없다고 말하지 않소?”라고 하였다.
가까운 절도 많이 있었으나 종형이 엄격하여 감히 절에 가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몰래 간다 하더라도 가까운 절에는 못 살 것 같아, 하루는 일찍 새벽에 일어나서 모친과 종형 몰래 도망가서 거기서 70~80리 되는 전주 봉서사로 갔습니다. 거기서 며칠 있어보니, 마음에 스승 삼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그곳을 떠나 근처 송광사라는 절에 갔습니다. 거기서도 역시 선생 삼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또 그곳을 떠나서 은진 쌍계사로 가서 진암화상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 화상께 두어 달 시봉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진암화상이 계룡산 동학사로 이사를 가시게 되어, 도암은 아직 중은 되지 않고, 진암화상을 따라서 동학사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갑신년(1884) 겨울인데 동학사에서 강원
암에 올라가서 장마를 만나 한 보름을 묵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부전이 아침 예불 때에 금고(金鼓)를 치는데, 그 소리를 듣다가 홀연 스스로 깨쳤으니, 시방(十方)이 겁외간(劫外間)이라. 그 후 백운암을 떠나 며칠 후에 천장사로 오셨는데, 수년 후에 경허화상이 올라오셔서 모든 법을 점검하시고 인가하셨으니, 당호를 ‘만공(滿空)’이라 하시고 다음과 같은 전법게를 설하셨습니다.
雲月溪山處處同 구름과 달, 시내와 산이 도처에 같음이
叟山禪子大家風 수산叟山 선자의 큰 가풍일세
慇懃分付無文印 은밀히 무문인無文印을 분부하노니
一段機權活眼中 일단의 기봉과 권도를 활안 중에 있게 하라
그 후 화상은 곧장 북으로 떠나가시고, 선사는 그때부터 종주로 세상에 나오셔서 모든 납자를 가르치시니 35세부터 출세하셨다고 합니다. 제1회는 천장사에서 마치시고, 제2회는 계룡산 대비암에서 마치시고, 제3회는 마곡사 매화당에서 하시고, 그 후
정혜사로 오셔서 계시는 중에 유점사에 가셔서 2~3회 하시고, 마하연에 가셔서 2~3회 하셨으니, 유점사에서는 납자가 53명이었고, 마하연에서는 60여명이었다 하며, 가신 곳마다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경오년(1930) 유점사에서 두회 산림을 하시고, 임신(1932) 계유(1933) 갑술년(1934)은 마하연에서 종주로 계셨으며, 그후로는 늘 정혜사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덕숭산 정혜사에서 병술(1946) 10월 21일에 고요히 열반에 드셨으니, 그때 세수 76세였습니다.
1)이 글은 선복스님(1886~1970) 상좌인 성오스님이 필사한 글로, 안성 법계사(주지: 도윤)에 있다가 수덕사 근역성보관으로 기증한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다. 선복스님은 12세에 입궁(入宮)하였다가 경복궁에서 원만스님의 법화경 설법을 듣고서 출가하였으며, 만공스님의 법제자이다.
2)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이다.
3)임인년은 1902년이다. 『경허법어』(경허성우선사법어집간행회 편찬, 1981년)에 따르면 경허화상과 범어사에 간 시기가 1898년으로 나와 있으니, 아마도 전사과정에 오류가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