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신령하고 터가 미묘함에 가히 세상천하의 도량 중에 으뜸이라, 그러므로(古=故) 삼성칠현이 여기에서 나오시고 전승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도를 얻는다고 한 것도 결코 우연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적의 역사위에 기록해 둔 것이 없어 이제 과거의 빛나던 일을 자세히 말하기는 어려우나, 전해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5년 원효조사께서 문을 여셨다고 하며 원래 뒤에 있는 오늘날의 견성암 터에 있던 것을 중간에 현재의 땅으로 옮겨 지었다고 하니 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여하간 현재 견성암 동
대에 나한전터가 있고, 또 암굴 아래에 많은 부서진 불상들이 흩어져 있는것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중건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도광50년 4월 창건'이라 하였으니, 아마도 상당히 오랜 역사적 고찰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 허구한 세월동안 절의 운이 번성할 때도 쇠퇴할 때도 있어서 중간에 구참선납인 정안비구가 절의 세를 잡고 각고의 수행을 하던 중에 불행히도 건물의 일부를 소실하고 그 상좌인 혜명과 함께 초갓집을 조금씩 구입하여 수리하였으며, 그 후에 혜월선사(혜명)와 경허화상 문하에 들어가서 선(禪)을 탐구하
다가 수심결의 '단지불회 즉시견성'에 이르러 활연이 깨달음을 얻고 다년간 이 절에서 보림수행을 한 후에 불기2939(임자)년에 영남지역을 향하여 종풍을 크게 선앙하게 되었다. 이어서 만공선사가 새로 덕숭의 가장 큰 어른이 되니 선사의 속성은 송씨요, 법명은 월면이다. 불기 289?년 신미 음력 3월 7일에 전라북도 태인읍에서 나셔서 14세에 출가하여 연함산 천장사 태허화상에게 의지하여 삭발하고 수계를 받아 시봉하던 중에 한 소년 유생이 와서 만법귀일의 화두를 고하였으나 상응치 못하고 이 때부터 의심이 생겨 그 입년인 불기 29
922년 을미년 7월 25일에 새벽종송 염불을 하다가 화엄게송(率=華, 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에 이르러 전에 없던 [도리를] 얻었다. 경허선사 문하에서 다시 무자화두를 탐구하다가 불기2929년 8월 5일 통도사 백운암에서 새벽종소리를 듣고 활연이 크게 개달아 불기 2930년 계묘에 경허선사로부터 무문인을 얻은 후에 글자 속 풍운이 급함을 보고 흔적을 남겨놓코
한숨을 보태고, 파도에 눈물을 흘리시던 자비 가득한 스님을 생각하니, 완전한 조선의 해방은 아직도 막연하고, 몸과 뼈만이라도 스님의 원력이 실천되었지만,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아! 이 어찌 크게 분하고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스님께서 미리 떠나실 준비를 하시던 것을 알지 못하고, 이제 일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뜻을 깨닫게 되니, 이 뼈아픈 애처로움을 그 어디에다 호소하랴!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 산중의 혼란을 막기 위하여 전국 유일의 총림제를 실시하게 하신 것이라든지, 당신의 소지품을 모조리 정리하신 일,
더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얼굴 털을 깎지 않던 스님께서 떠나시던 날 손수 면도를 하시고 거울에 비친 당신 얼굴을 향해서 "자네하고도 오늘이 마지막일세." 하고 쓸쓸히 웃으시던 일, "전월사는 협소해서 산중 대중들이 곤란할 것이니, 언제든 큰절에 내려가서 죽겠다"고 하시던 말씀과 같이 일부러 정혜사로 내려오셔서 물 한 모금도 안드시고 선전에 든 채 고요히 떠나신 그 태연자약한 열반을 생각할 때마다 아아, 가슴이 터질 듯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별증이 있어야지"라며 시시때때로 하시던 말씀! 명목뿐인
조선의 해방이 지나간 왜정시대의 별증이었다면 미·소 대치하의 이 강토에 또다시 별증이 없으리라고 그 누가 단언하겠습니까.
스님이시여! 확실히 믿습니다. 단지 현실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까지 별증이 있으리라는 것을-. 그 때 비로소 생사의 거래를 끊고 가신 스님의 본래 면목을 친견할 것을 믿고, 이에 굳게 맹서 하옵나이다.
스님이시여, 길이길이 안념하소서.
만약 스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덕숭산 꼭대기에서 달을 바라보라.
가득 차고, 이지러지는 밝고 어두움 속에
만공의 빼어난 기운이 스스로 오가는구나.
1946(불기2973) 12월 일. 미좌 사미 중은 분향
1946(불기2973) 12월 일. 미좌 사미 중은 분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