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석전속시초에 수록되어 있는 글이며 2개의 시가 기록되어 있다. 석전의 기록에 따르면 1902년(임인)에 경허선사와 석전이 청암사에서 하룻밤 동안 시를 주고 받으며 다음날 헤어졌다(一宿以別). 계산하면 경허선사는 53세이고 석전은 32세 때였다. 그 때 남은 시가 경허집에 있는 "和映湖堂"1수이다. 그리고 41년 뒤인 1943(계미)년에 그 때(顧己四十二載)를 기억하며 석전이 '화영호당'의 시에 운율에 맞춰서 2수를 지어서 기록했다. 운자는 年,連,仙,邊,憐의 다섯개가 일치한다. 여기서 "경허선사가 입적하신지 이미 오래되었다(禪師化已久矣)"고 표현하고 있는데, 경허선사는 1912년에 입적하였으므로 선사가 입적한 31년이 지난 후에 쓰여졌다. 만해선사가 쓴 선학원본 경허집이 1943년에 발행되었고, 이 글이 같은 해에 쓰였으며, "경허집에 있는 鏡虛集中"이라는 표현을 통해 아마도 이 글은 석전이 선학원본 경허집을 보면서 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시를 지을 1943년 당시 석전은 74세이다. 이 글은 김종진교수가 석전속시초에서 발견하여 제공하였다.
법진